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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Sep 28. 2020

행복한 원죄

진상이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만

너처럼 핸드폰 흘리고 다니는 애는
꼭 이름 바꿔놓아야 돼     


폴더 폰 시절, 친구가 말했다. 나쁜 마음먹은 사람의 손에 분실 폰이 들어가면 맨 먼저 통화 목록을 확인한다지. 그중 엄마나 아빠를 찾아서 ‘당신의 자식을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 다시 만나고 싶으면 돈을 보내라’라고 말한다나. 


부모님과 떨어져 살던 나는 겁이 덜컥 나서 엄마는 길석님, 아빠는 최 사장님이라고 바꿨다.    

그시절의 유선전화기, 물론 우리집 전화가 이렇진 않았지만

스무 살 까지 햄버거 하나를 다 못 먹었다. 친구들이 내숭이라고 할까 봐 꾸역꾸역 다 먹으면 그날 저녁 어김없이 탈이 났다. 도시락 반찬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던 소시지와 햄도 안 먹었다.


스물다섯 살 까지 삼겹살과 순대도 못 먹고 모든 면류는 1인분을 다 못 먹었다. 길석님은 딸이 어디서 뭘 먹고 온다 해도 늘 집밥을 준비했다. 밖에서 제대로 못 먹어서 짜증이 난 날은 괜한 푸닥거리다.     


“나는 왜 이렇게 못 먹는 게 많아?”

하면 길석님은


“엄마랑 속이 똑같아서 그래. 너랑 나랑 목소리도 똑같잖아. 엄마도 밖에서 뭐 먹으면 속이 안 좋아. 그냥 집에서 먹어. 겉은 네 아빠랑 똑같지만 속은 백 프로 나야.”


 ‘백 프로 나야’라는 말이 나와 길석님의 연결고리 같아서 든든했다. 우리 모녀 사이의 공간을 팽팽하게 채워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까탈스러움이 빚은 길석님의 속 시끄러운 아침은 생각도 못했다.  

    



고등학생 때 급식이 처음 생겼다. 엄마들은 도시락 준비 해방으로 기뻐했지만 길석님은 예외였다. 내가 진상 짓을 했기에.


엄마가 그냥 도시락 싸주면 안 돼?
진짜 못 먹겠어.
이틀 동안 맨밥만 먹었어!    
지금은 없어서 못먹는데...누가해주면 그저 감사함


길석님은 출근하는 워킹 맘이면서 도시락 두 개를, 안 먹는 거 많은 그 와중에도 반찬 너 댓 개를 준비했다. 그녀의 작은 손은 희미한 밝음이 깔린 새벽을 부지런히 걷어냈다. 한기가 드는 날에도, 습기와 냉기가 교차하는 날에도 예외는 없었다.


나는 설거지 급으로 깨끗하게 먹는 걸로 내 도리를 다했다. 길석님은 깨끗이 비운 도시락 통을 좋아했으니까.

길석님도 후식과일까지 싸줬다

나도 엄마가 됐다. 내 아이가 밥상을 깨끗하게 비우면 나 역시 좋다. 그런데 마냥 좋지는 않다. 나만큼 음식 가리는 아이가 깨끗하게 먹게 하려면 메뉴 선정에 머리를 싸매야 하니까. 재료 손질하는 내 손을 보며 길석님의 속 시끄러운 새벽이 그제야 그려진다.      


 밥을 차려놓고 진이 빠져서 방에 들어왔다. 길석님에게 전화했다.      


“대체 내 음식 취향을 어떻게 맞추고 살았어?”

“몰라. 생각한다고 답이 있냐. 그냥 했지”
“몰라줘서 미안해”

“미안하단 생각도 들어? 다컸네.
그래도 내가 고민해서 네가 잘 먹으면
행복하긴 했어”

“음식 하는 손을 보고 있으면 엄마랑 똑같아서 생각이 나더라고.  
맞아. 피곤하긴 해도
먹는 모습 보면 행복하지."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게 원죄라는 거다. 흐흐”

“맞네. 애가 안 먹는 걸 탓하기 전에
내 전적을 생각해야지 뭐. 흐흐”     




아이가 주 1회 학교 가는 날이다.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놀겠다고 제대로 먹지도 않는 급식을 신청했다. 나처럼 맨밥만 먹고 올 가능성 95프로다.


그시절 길석님처럼 나도 싱크대 앞에 다시 선다. 싱크대 위 창문 밖 구름 빛도 하늘빛만큼 또렷해졌다. 가을이 제대로 들어앉았다.


원죄면 어떠랴. 길석님의 속 시끄러웠지만 행복했던 한 시절이 내 손으로 이어지고 있다.

싱크대 앞에서 바라보는 가을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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