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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Feb 15. 2022

대기업 공채가 들려주는 영국 유학 이야기

4장 도전의 결과

Chapter 52. C사와의 아픈 인연

가장 마지막으로 입사 전형이 이루어지는 곳은 C사였다. C사의 채용 공고를 살펴보면서 어느 분야에 원서를 넣을 것인가 고민을 거듭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C사에 외식 계열사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 맥도날드에서 4년, 영국 맥도날드에서 1년, Costa에서 바리스타로 1년 이상 근무하며 외식업계에 경험이 있던 나에게 딱 맞는 회사처럼 보였다. 사실 나처럼 첫 사회생활을 외식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널렸을 테지만, C사의 공개채용 모집 요강을 바라보던 내 느낌은 그랬다. 니, 뭔가 인연이 있을 거라고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울산에 있는 대학 동기 중 C친구 도진이가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진이는 1년 전 C사의 계열사 중 하나인 급식 전문 업체에 그룹 공채로 취업했다. 당장 도진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도진이의 반응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하고많은 회사 중에 왜 C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당시의 나로서는 부럽기만 한 도진이가 왜 자기 회사에 애착이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잡은 물고기에 밥 안주는 뭐 그런 건가? 아니면 뭐 남에 떡이 커 보이고 그런 거? 무언가 불만이 많아 보였던 도진이는 지금도 아주 열심히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신입사원 때는 누구나 남에 회사가 좋아 보이나 보다.


C사의 인·적성검사를 보러 가는 날 시험장 안내를 맡고 있는 도진이를 만났다. 검은 양복을 입고 회사를 대표해서 지원자들을 안내하는 그의 모습이 사뭇 부러웠다. 아니 겁나게 멋있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백팩을 메고 있으니 무언가 초라해진 기분이었다. 도진이는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고 더 좋은 회사에 가라고 나를 회유 했지만 나는 C사가 좋은 회사라며 그의 말을 흘려버렸다. 자기는 근사하게 대기업 공채로 취업해놓고 친구놈에게는 오지말라니. 후회할 때 후회 하더라도 나도 대기업 밥좀 먹어 보자! 그때 도진이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동안 몇몇 기업의 인·적성에서 보기 좋게 낙방한 경험이 있는 나였기에 큰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다만, C사는 인·적성 성적이 절대적 채용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여느 인·적성 평가와 비슷하게 시험을 치렀다. 문제는 최선을 다해 풀었고, 인성평가는 최대한 일관된 대답을 하고자 노력했다. 네티즌들이 알려준 그대로 말이다. 평소 수학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나에게 수학 문제는 여전히 어려고, 빈칸으로 남겨둔 것도 있었다. 인·적성에서만큼은 한 번호로 찍어 틀리느니 차라리 비워두고 풀지 않는 편이 더 쿨해 보일 것만 같았다. 이제는 운에 맡기자는 생각과 함께 시험장을 나왔다.


취준생으로서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있었고, 이제는 대기업 공채도 대부분이 종료되었다. 아직 몇몇 기업 결과 발표 전이었지만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 집에 얹혀살며 밥만 축내는 식충이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일단 돈이라도 벌지 않으면 찌질한 취준생일 수밖에 없다. 런던에서도 찌질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찌질함은 비참함을 의미했다. 돌아오지 말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한국에서 취업을 해야지! 수시로 후회와 체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더 늦기 전에 중소기업이라도 알아보아야 했다. 대부분의 대기업일정 기간 이상 해외  사실이 증명되면 별도의 영어점수 제출이 면제되지만, 중소기업은 이러한 제도가 없었기에 서둘러 토익 시험부터 준비하기로 했다.


토익 시험을 치르는 날은 C사의 인·적성시험 다음날이었다. C사 인·적성시험을 마치고 나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급격히 허기를 느낀 나는 집 근처 시장에 들러 빵 몇 개를 사서 집으로 왔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탓도 있지만 오랜만에 머리를 썼더니 몸이 아주 피곤한 했다.  온 빵을 허겁지겁 먹고는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배가 아픈 것을 느끼 잠에서 깼다. 장염인 것처럼 아랫배가 아파왔다. 저녁무렵 집에 온 누나에게 배가 아프다고 이야기하자 누나가 약을 사 다. 약을 먹고는 곧 나아지겠지 하며 다시 잠이 들었지만, 새벽에도 계속 배가 아파 자다 를 반복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배는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예약해 둔 토익시험 때문에 일찍부터 서둘러 시험장으로 향해야 했다.


시험장에 도착해서도 복통은 계속됐다. 어제 먹은 빵을 원망하며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근데 시간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배가 아픈 와중에도 듣기 평가는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래도 런던에서 5년 가까이 살았다고 토익 정도는 쉬운 수준이었다. 읽기 시험으로 넘어갈 때쯤 통증은 극에 달했다. 가만히 앉아있기도 어려울 만큼 아랫배가 쥐어짜듯이 아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나갈까 하는 생각이 수십 번도 더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 이 시험을 어떻게든 치르면 기본적으로 회사에서 요구하는 토익점수 이상은 받을 지만 지금 박차고 나가버리면 또다시 시험을 예약하고 점수를 받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자칫하면 취업 시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픈 배를 움켜잡고 끝끝내 시험을 모두 치러야 했다. 말도 못 하게 아팠지만 참 수밖에 없었다.


시험을 마친 후 누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집에서 가까운 구로 K병원을 찾아 응급실로 들어갔다. 토요일이라 외래 진료는 당연히 없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응급환자가 넘쳐나고 있었다. 당시 유행이었던 신종플루 의심 환자들로 말이다. 전국에 신종플루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전부 이 병원으로 모인 것 같았다. 주로 아이들이 많았는데, 몇몇 혈기왕성한 아이들은 전혀 아파 보이지도 않게 병원을 놀이터 삼아 잘도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지금 걸을 수도 없이 아픈데 말이다. 응급실에 접수하자 아주 당연하게 기다리라는 이야기가 따라왔다. 한 소파에 앉아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 지옥 같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간호사에게 재차 배가 아프다는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순서대로 처리해 주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앵무새 같은 간호사에게 짜증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저녁이 되도록 한참을 기다린 후  바로 앞에 온 아이가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나는 간호사에게 가서 배가 아파 못 견디겠노라 다시금 이야기했다. 응급실에 들어갔다 나온 간호사가 나를 응급실 침대로 안내했고, 곧이어 놓아준 링거를 맞고는 통증이 가라앉았다. 진통제였던 것 같은데 왜 이제야 진통제를 주는지 원망스러웠다. 곧이어 의사가 와서 배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언제부터 이랬냐 한다. 어밤부터 이랬다 했더니 흠칫 놀라면서 많이 아팠을 거란다. 그래 이 의사 양반아! 많이 아팠다! 정말 죽을 만큼 아팠는데 참으면서 토익시험도 치렀다! 그것도 890점이라는 점수까지 받으면서! 의사가 놀라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맹장염이 오면 보통 움직이지도 못한다. 근데 나는 그렇게 아픈 채로 무려 24시간 가까이 버틴 것이다. 기다리라고 한 간호사에게 한마디 쏴주고 싶지만 한 번 더 참았다. 이 병원에는 수술실이 부족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 수술 며칠간 입원하라고 했다. 그럴 거면서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


생각해 보니 아찔했다. 만약 내가 영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영국은 인도주의적 국가니까... 내가 영국에서 맹장에 걸렸다면 모르긴 몰라도 응급실에서 8시간 이상은 기다렸어야 할지 모른다. 영국의 응급실은 방이 두 곳으로 나어지는데, 하나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응급환자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두면 죽을만한 응급 환자이다.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면 기본 대기 시간이 4시간에서 8시간이지만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면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낸다. 실제로 한인회에서 잠시 함께 일했던 한 남성분은 아이가 선천적으로 앓고 있는 희귀병 때문에 영국왔다고 했다. 한국에 있으면 구급차가 오기 전에 아이가 죽을 것 같아서다. 그만큼 영국은 의료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의료에 취약한 곳이기도 하다. 한번은 친한 동생이 운동하다 팔이 부러졌다. GP(동네마다 위치한 보건소와 같다.)로 가서 상황을 이야기더니 붕대 한 묶음과 먹는 약을 줬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Sorry, there's nothing I can do for you." (미안하지만 해줄 게 없네요)

란다. 부러진 팔에 먹는 약이  말이란 말인가? 한국과 같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 곳이 영국이었다. 이번의 경우는 내가 운이 좀 없었던 축에 속하지만, 막상 치료를 받고 나니 한국에서 아픈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좋았겠지만...


맹장 수술로 인한 입원 기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하루 한 번 병원을 다녀온 후에는 좁은 방 안에서 몇  전 종영한 드라마를 몰아 보거나 인터넷으로 취업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누나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순도 100%의 백수 생활이었다. 치여 살던 논문 덕에 책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었다. 친구가 없으니 운동이건 게임이건 아무것도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대기업 공채가 대부분 낙방해 불안한 마음이 있긴 했지만 일단 수술 후 기운을 차릴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을 패잔병 마냥 기운 없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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