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인지 워킹맘의 일상인지 가족사랑에 대한 에세이인지 점점 애매해져 가지만 회사를 다녔다가 갑자기 네일아트를 배웠다가 카페를 했다가 자격증 시험 준비를 했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정체성 모호한 내 인생 같아 뭐 어때 싶어 진다. 그래서 지난번 잠깐 얘기했던 나의 극악무도한 첫 직장 생활을 반추해 본다.
회피 성향이 있는 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두려워 사회로 걸음 하는 것을 유예하고자 대학원에 가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조바심 나서 섣부르게 취업했다.
내가 그렇게 된 데엔 물론 의지가 부족한 내 심성도 있었지만 엄마의 압박 또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전형적인 K-장녀로 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실망만 시키는 자식으로 엄마는 내가 논문 발표까지 모두 끝나고 연구실에 있던 짐을 모두 정리해 집에 와있던 약 한 달도 나를 못 견뎌하셨다. 볼펜 같은 사무용품이랑 책 등의 개인 용품을 담은 종이박스를 가지고 온 날 정신 사납다며 엄마는 그걸 집에 가지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집이 결코 작지 않고 방에 정리해 두면 됐는데 말이다. 엄마는 그저 대학원씩이나 나와놓고 졸업 전에 취업하지 못한 내가 꼴 도보기 싫은 거다. 결국 엄마의 신경질에 문 밖에 둔 내 물건은 다음 날 몽땅 사라져 나는 내가 쓴 논문 하나 남지 않게 되었다.
내 딴에는 상반기 공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준비 중인 건데 엄마는 한심하다며 왜 면접을 보러 다니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거냐며 내 피를 말렸다. 그래, 한심, 솔직히 인정. 하지만 사람 자존감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그 말이 나는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엄마는 본인이 정해놓은 방향으로 내가 살기를 바랐고 내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무시하고 한심하다며 비난했다. 나는 나의 엄마를 표현할 말 중에 이기적이란 단어가 그나마 가장 근접하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늘 생각했는데 어느 날 아주 적합한 말을 배웠다. 나르시시스트. 난 내가 왜 이렇게 매사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지 나 스스로를 탓했는데 그건 모두 나르시시스트인 엄마의 영향이었다. 엄마를 실망시켰을 때 무섭고 두렵고 속상하던 마음 한편 은근슬쩍 기지개를 켜던 후련함.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지만 나는 엄마에게서 조금씩 멀어져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단념이 빠른 나에게 그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상반기 공채를 준비하던 나는 서류 심사에 통과해 필기전형을 앞두고 있었지만 면접 본 한 곳에서 합격통보를 받았고 엄마는 내가 붙을지 떨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매달리기보다 합격한 곳으로 갈 것을 종용하셨다.
(후에 동생이 취업을 앞두고 있을 때, 나한테 했던 것처럼 조급하게 구는 엄마에게 애 닦달해서 나같이 그지 같은 선택하게 만들지 말고 알아서 앞가림하는 애니 그냥 두라고 해서 정말 후련했다.)
면접 땐 사실 다닐 거라는 생각이 없어서 조금 당돌했다. 각 팀장과 연구소장이 있는 실무면접이었는데 드물게 사장님까지 자리에 계셨고 사장님께 연구논문에 대한 질문을 받고 간략히 대답한 후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다시 손을 들고 조금 더 설명해도 되겠냐고 했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난 원래 되게 무기력하고 아니면 말지. 하고 포기가 빠른 사람인데. 아무튼 그걸 좋게 보신 사장님 덕에 합격 후보에 올랐지만 나를 데려가고 싶어 한 팀은 티오가 없었고 다른 팀에서 나를 선심 쓰듯 거둬갔다.
팀이 생긴 이래 여자는 받아본 적이 없던 팀. 같은 대학, 과 선후배가 진을 치고 있는 학연, 지연 그리고 흡연의 대환장 콜라보가 있는 곳.
8대 1의 성비. 그들은 팀에서 혼자 여자인 내가 불편하고 못 미덥고 탐탁지 않으면서도 밖에선 나를 내보이길 좋아했다. 나는 일종의 팀의 장식품이었다.
멘토 같은 역할을 했던 내 바로 윗선임은 일 적으로는 매우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지금 내가 그의 나이가 되고 생각해보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아이 보기 싫어서 집에 늦게 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 본다면. 또 그 체계와 문화가 본인 성격에 맞다면. 좋은 팀이다. 무척이나 팀워크가 좋고 단합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점심에도, (야근이 당연하니) 저녁에도 우르르 몰려 같이 밥 먹으러 가고, 대리급까지는 형 동생 하며, 일주일에 세네 번은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가지는 팀 문화.
나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부족하다. 소주 한 모금이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온몸에 울긋불긋하게 반점이 생긴다. 그런데도 그땐 왜 사회생활=회식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울면서 새벽 4시까지 술자리에 끌려다닌 적도 있다.
9 to 6이지만 정시 퇴근=일찍 간다는 문화라 일찍 가고 싶으면 6시 반이나 되어야 눈치 보며 선임들 자리에 일일이 찾아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를 해야 했다. 이걸 모르던 입사 초반에 바로 윗선임이 먼저 퇴근하며 남은 실험 마무리되면 가라고 해서 자리에서 인사만 하고 집에 갔다가 다음날 선배에게 따로 불려 가 주의를 받았다.
나와 선배 한 명을 뺀 모두가 흡연자. 사내 정치, 주요 안건들은 모두 흡연터에서 나왔다. 윗선임은 실험 중간중간 잠깐 쉬자며 자주 나를 데리고 흡연터에 갔고 그때 나는 그런 것들을 겨우 귀동냥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술은 전혀 입에도 못 대는 동생 역시 나와 비슷한 직군이라 나는 술 못 마시면 담배라도 피워라 했더니 동생은 멋쩍게 웃으며 내게 담배를 내보였었다.
그런 게 사회생활인 시절이었다.
회사가 좋좋소라 그런 거 아니야? 할 수 있겠지만 대기업은 아니지만, 중견기업이었고 복지 수준도 대기업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굉장히 좋았다. 근무 환경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연구소 한정 자율복장이었는데 어느 정도의 자율복장이냐면 같이 입사했던 동기 한 명은 매일 모자를 쓰고 다녔다. 기술영업팀과 외근도 많아서 근태관리에도 꽤 자유로웠다. 팀 자체 분위기도 그랬다. 화기애애하고 모두 밝았다. 다만 연구소라면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제일 윗선의 생각, 회식 문화, 개인 사생활을 모두 오픈하고 공유해야하는 그 팀의 조직문화가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회식하자. 회사 돈으로 비싸고 맛있는 거 먹자. 그러면 내 돈 주고 충분히 사 먹을 수 있고 혼자 편하게 먹고 싶어.라는 반항적인 생각부터 불쑥 드는 내 성격. 나는 일주일 중 회사 가는 5일이 내 딴에는 외출이기 때문에 주말엔 날씨가 아무리 좋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들, 안락한 내 공간에 가만히 누워 미드를 정주행 한다거나 집 근처 카페에서 한두 시간 정도 앉아서 책을 보거나 노래를 듣는 게 가장 좋은 사람이다.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남편은 막상 밖에서 만나면 잘만 놀면서 돌아와서는 힘들어 하는 날 별종같이 봤다. 당시 남자 친구이던 지금의 내 남편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완전 사회 부적응자 같은데,
사회생활 잘만 하네?
극극 내향형인간의 사회생활을 니가 알아? 지금도 욱하고 치민다.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은데 너무 극단적인 경험을 했어서 그랬을까. 나는 재취업에 도전하며 처음 면접봤던 곳에서도 그랬고 옮긴 직장에서의 면접에서도 먼저 선을 그었다.
핑계라기엔 사실이긴 하나 이유가 아주 좋긴 했다. 남편이 재활 중이기 때문에 육아를 전담해서 회식 참석 안 함. 같은 이유로 물론 시간 내에 분명히 할 일을 마쳐야 가능하겠지만 시간 외 근무 못 함.
커뮤식 사회생활 배운 것처럼 나열한 워딩 그대로 말한 것은 아니고 많이 순화해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회식 X, 야근 X에 대한 의사는 분명히 전달했다.
덕분에 재취업한 곳, 이직한 곳 모두 회식 절대 강요 없고 야근 없는 곳에 다닐 수 있었다. (물론, 환영회나 무언가 큰 기념이 있는 회식엔 참석했다.)
실험이란게 간혹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더 걸릴 수도 있는 일이라 가끔 정시를 넘겨 내가 있는 걸 본 동료들은 화들짝 놀라며 왜 아직도 집에 안갔냐며 묻는다.
그때는 당당하게 하지 못했고
지금은 당연하게 하는 말이 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