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서 우리는 둘 다 직장을 그만 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책없고 철없는 짓이 아닐 수 없지만 그 당시에는 휴식이 정말 간절한 직장 3년차였다. 양가 부모님들의 걱정은 애써 모른체 하고 우린 여행을 다니며 6개월 정도를 쉬었다. 그 일년 간 나는 괌을 여섯 번이나 다녀왔으니 정말 미쳤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쉰 후에 남편은 가게를 열었다. '노는 게 제일 좋아'인 나는 엄마한테 한심하다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계속 놀았고 남편이 가게를 열면서 인건비를 줄이고 자리잡는데 도움이 되고자 가게에서 서빙 및 설거지와 청소 등을 도와주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사실 원래 내 계획에 없었다. 나는 그리 온화하고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에. 가끔 나 스스로가 버거울 때가 있는 나는 나의 부정적인 면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봐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임신했을때 무척이나 바랐다. 남편을 닮은 아이었으면 하고. 여느 매체를 통해 그동안 봐온 임신은 인지 순간부터 아이와 사랑에 빠지고 교감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저 얼떨떨하고 약간 불안한 상태였다. 내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울 수 있을까? 하며.
인생은 참 얄궂다. 나의 바람은 불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아이는 겉껍데기만 남편을 쏙 빼닮았다. 알맹이는 온전히 나인 것이다. 흔히 등센서라고. 내려놓으면 자지러지게 울고 자지 않은 예민함 덕에 나는 하이가 생후 100일이될 때까지 친정에 있었다. 애기 잔다 그만 내려놔라. 아예 아이를 안고 생활하는 내가 안쓰러워 부모님은 초반엔 자주 그 말을 하다 나중엔 학을 떼셨다. 봐, 내려놓지? 바로 깬다? 누가 봐도 완전 깊이 잠든 모양인데 내려놓는 순간 눈을 번쩍 뜨는 하이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100일 가량을 친정에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집에 온 나는 24/7 독박육아를 하게 된다.
남편은 거의 동틀 무렵에 집에 와서 잤기 때문에 이미 생후 6개월에 괌까지 데리고 갔다온 아이라 나는 하이를 데리고 나와 온갖 카페, 음식점, 백화점 등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섭렵하고 문화센터를 다니는 것도 모자라 에버랜드 연간이용권을 끊어 일주일에 두 번은 가는 바깥생활을 했다.
덕분에 말을 배운 후로는 나갈 때 아빠 내일 또 봐. 가 하이의 인사였다.
그래도 가게 정기휴무날에는 꼭 같이 어디든 다녀줬으니 나도 독박육아에 큰 불만은 없었다.
하이는 미루고 미루다 3살 여름, 어린이집에 입소했다. 그것도 남편은 계속 내가 집에서 보육하길 바랐지만 시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암진단 때문이었다. 방사선, 항암치료, 검사 등으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야 했는데 당시 가정주부+운전가능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몇 번 하이를 데리고 가다가 차를 너무 오래 태우는 것 같아 어린이집 입소를 결정했다.
막연한 계획으로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고 어느정도 적응하면 나도 다시 취업을 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일여년을 보내고 시어머니가 완치 추적관찰만 남았을 때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재활 중 별 기대없이 넣은 이력서로 어떻게 면접까지 보고 취업한 것이다.
첫 출근은 무려 괌에서 돌아온 다음 날.
부서진 어깨뼈를 고정했던 철심 제거 수술 후 상처가 아물자마자 떠난 괌에서 나는 출근 확정 전화를 받았다. 면접 당시 같이 면접을 본 지원자들의 당당함과 패기에 눌려 업계 특성상 경력단절 5년+육아 중인 아이 엄마인 난 아마 안 될 거라고 단념하고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위로했는데 출근이라니!
왜 업계 특성이냐면.
과 선배들이 많이 근무하는 회사에선 신입 추천을 받으면서 여자는 안 뽑는다고 할 정도로 남초 직업인데다 내가 첫 근무했던 곳은 팀이 생긴이래 '여자'인 팀원은 받아본 적도 없고 야근은 당연하고, 힘드니까 끝나고 술 한잔 하자가 일주일에 세 번은 됐다. 극악무도한 나의 첫직장 이야기는 다음 번에 한 페이지를 전부 할애하도록 하고 다시 돌아와서...
재취업까지 경력단절 기간이 그나마 좀 짧았다면 경력이 조금이나마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내 긴 공백으로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력서에 기본 인적사항, 논문, skill 등을 쓸 때까지만 해도 막힘이 없었지만 자소서가 문제였다. 왜 그렇게 공백이 길었는지, 그동안 무엇을 해서 어떤 경험을 했고 무엇을 얻었는지. 아이를 낳았고, 암투병 하시는 시어머니와 큰 사고로 입원한 남편의 병간호를 했다고 소위 감성팔이식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포장해서 써내려갔지만, 나는 그동안 너무 안일하고 태평하게만 산 내 스스로가 말그대로 너무 한심해서 현타가 왔다.
고작 3년이지만 결혼 전 쌓은 경력은 그보다 더 오래 쉬었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경력무관, 그리고 조금이나마 내 전공지식이 필요한 곳을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면접까지 보고 출근하게 된 곳은 2년 계약직 파견. 하지만 정규직 전환이 열려있는 곳이었고 가장 중요한 아이 케어의 문제는 당시에 남편이 재활 중이라 가게를 모두 정리하고 쉬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없이 출근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출근 첫 날 엄마 다녀올게. 하니 놀란 눈으로 하던 것도 다 내팽겨치고 달려와 옷소매를 붙잡고 늘어지며 울던 하이. 아빠 할머니 다 있는데 뭔 걱정이야. 했지만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출발해서 아기가 많이 울었냐 톡을 하니 너 나가고 바로 울음 그쳤어ㅋㅋㅋㅋ하는 대답이 돌아와 나는 즐겁고 조금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그렇게 나의 재취업과 더불어 남편은 일년간 육아대디의 삶을 경험한다.
남편은 워낙 자상하고 다정해서 아이한테도 잘 해 예민하고 조금은 신경질적인 나는 내가 능력이 1000% 된다면 남편을 전업하게 하고 싶게 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맞벌이 중.
하이도 일주일에 하루만 온전히 아빠를 가지던 것에서 잠에서 깨고, 잘 때까지 아빠가 있으니 너무나 좋아했다.
안 그런 척 노력하는 거지 사실 인간관계가 너무나 피곤하고 싫은 나와 달리 사교적인 남편덕에 그 일년간 아이는 눈에 띌 정도로 밝아져 일 년 내내 보듬어 안고 키워주신 어린이집 선생님이 매우 감격하실 정도였다.
그리고 육아대디의 삶이 어느정도 익숙해져 갈 때쯤. 남편은 내게 사과했다.
하이가 하원하는 오후 3시 쯤. 남편이 전화를 했다.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무슨 소리냐 하니.
아니 옛날에 내가 부탁한 거 니가 시간 없어서 못했다고 했을 때 애 어린이집 보내고 3시까지 시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못했냐고 그랬는데 진짜 시간 없어. 운동 갔다가 점심 먹은 거 밖에 없는데 벌써 3시야.
하는 풀죽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어떤 것은 경험하지 못하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