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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by 세실

사순절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부활절 전 40일간의 절기.


5년 전 이맘때가 생각난다.

남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온몸의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어느 곳 하나 안 아픈 데가 없어서 이 병원 저 병원 순례를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그저 몸의 피로가 누적된 근육통 정도로만 여기는 것 같았다.

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한의원 등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는 동안 병세는 점점 깊어져 침대에 눕고 일어나는 것조차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급기야 운전도 제대로 하지 못해 택시로 병원을 다녀야만 했다.

택시를 탈 때도 몸을 구겨 넣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병명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렇게 활발하게 움직이던 사람이 저 지경이 되었는데 병명도 모른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증세가 나타난 지 벌써 9개월.

방안은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들로 넘쳐났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많지가 않았다. 침대에 뉘이고 옷 입히고 양말 신겨주고 그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 외에는.

그때가 사순절이었다.

나는 매일 성당에 가서 사순절에 드리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간절히 매달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고통에 내 고통을 더 얹어드리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양말을 신겨주며 보니 발이 부어도 너무 부어있었다. 사혈침이라도 맞아 피라도 좀 빼보자고 가까운 한의원을 찾아갔다.

증세를 들은 한의사는, 류머티스 관절염 같은데요.라고 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여태 그런 병명은 생각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생소한 병이구먼.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졌다. 증세가 흡사했다. 아침엔 온몸이 경직되어 움직이기 힘들다가 오후엔 서서히 풀리는 등 모든 게 비슷했다.


기가 막혔다. 이렇게 증세가 뚜렷한데 왜 다른 병원에선 모른단 말인가. 한두 군데 다닌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평균적으로 정확한 병명을 아는데 2년 정도 걸린다고 나와 있는 걸 보니 다들 우리처럼 헤매고 다니다가 우연히 알게 된다는 얘긴가. 오히려 우리가 빨리 안 셈이로군.


대학병원 류마티스과에 예약하려니 한 달 반을 기다려야 한단다. 병세가 저토록 심각한데 걸음도 맘대로 못 걷는데 한 달 반을 맥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염치 불구하고 지인 찬스를 동원했고 다행히 이틀 뒤 서울 아산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병명은 류머티스 근육염.

면역세포가 자기 몸을 적으로 알고 온몸의 근육을 공격하는 병이라고 했다. 병명을 정확히 알고 나니 마치 다 나은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내 기도가 가 닿은 걸까.

류머티스는 나라에서 관리해 주는 병이라 치료비, 약값을 10/1 만 내면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대한민국 만세다!


그게 벌써 5년 전이다.

그렇게도 간절히 기도 했던 그 사순절을 또 이렇게 맞이했다.

나는 은혜받은 만큼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그 간절했던 마음이 많이 퇴색한 것 같아 부끄럽다.

남편은 거의 완치 판정을 받았다.

처음엔 4알씩 먹던 스테로이드 약을 이젠 이틀에 반 알씩 먹고 있다.

감사하다는 말로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게 송구스럽다.


부활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남은 사순절을 좀 더 알차게 보내야지. 5년 전 그때만큼은 절절하지 못하겠지만 마음 모아 십자가의 길을 기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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