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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 미정 Apr 27. 2024

제발, 더 이상은...


며칠 전 노트북 화면이 이상하게 나왔다. '어라. 이게 왜 이러지.' 하며 신랑을 불렀다. 

"오빠, 이거 좀 봐줘, 화면이 이상해." 신랑이 노트북을 보더니 "깨졌네. 떨어뜨린 적 있어?"라고 물었다. 

노트북을 왜 떨어뜨리겠는가 핸드폰도 아니고 "아냐, 나 그런 적 없어."라고 했다. 신랑이 노트북 화면을  살펴보더니  "키보드에 이어폰 두고 뚜껑을 세게 닫았네 닫았어."라고 했다.  "아니야 나 절대 그런 적 없어."라고 강력하게 말했지만 신랑의 말이 소름 끼치게 정확하게 맞았다.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약하게 만든 거야. 좀 튼튼하게 만들지. 이런 걸로 깨지면 어디 이거 들고 다니기나 하겠어?"라고 말하는 나에게 신랑은 무식한 여편네라며 놀렸다. 

사실 이런 기계에 무식했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노트북 수리하는 기사님도 작은 충격에도 망가질 수 있으니 조심해서 사용하라고 했다. 생각보다 금방 수리가 되었고 수리된 노트북을 예전과 달리 조심히 들고 나왔다. 

수리가 다 된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내 몸에 있던 암도 깨끗하게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내 몸도 애초에 좀 조심해서 사용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내 몸에 나는 얼마나 무식했던 걸까 싶었다. 

나를 좀 사랑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다칠까 봐 조심하고 나쁜 병이 오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몸에 좋은 것 좀 챙겨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이다. 힘들게 AS 받았으니깐 다시 또 나빠지지 않게 이제라도 내 몸을 소중히 여겨야지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상호대차 신청했던 책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신나는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서관 가는 길은 오르막 길이지만 바람도 시원하고 그늘도 꽤 있어 힘들지 않다.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걷고 있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작은 형님 2였다. 신랑은 4남매 중 막내로 나에게는 형님만 3명인데 큰 형님 말고 작은 형님들은 알아보기 쉽게 1,2번으로 저장해 뒀다. 작은 형님 2는 우리 신랑 형의 부인이다. 

'어버이날 식사하는 것 때문에 전화 주셨나? 내가 먼저 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며 반갑게 "형님!"하고 불렀다. 그런데 형님의 목소리는 좀 잠긴 것 같았다. '감기에 걸렸나?' 생각하는 찰나 

"이번 어버이날 식사 장소는 동서가 알아봐 줄 수 있을까?"라고 하셨다. "네, 이번엔 제가 알아볼게요. 감기 걸리셨나 봐요? 목소리가 좀 잠긴 것 같아요."라고 했다. "응... 아니... 사실은 좀 일이 생겼어." 일이 생겼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난다. "무슨 일이요? 애들 어디 다쳤어요?"라고 물었다. "애들 아니고 내가."라고 했다. "형님이요? 무슨 일인데요?" "동서... 나 암 이래. 자궁암." "네?" 분명 가벼운 발걸음을고 걷고있었는데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갑자기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그러면서 저번에 자궁이 안 좋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 저번에 아프다고 하셨는데 그게 그럼 암이 된 거예요? 아프다고 한지 벌써 몇 달 됐잖아요.?"

"병원에서 지켜보자고 했는데 자꾸 아픈 거야. 그래서 다시 검사해 봤더니 혹이 좀 크다고 하더라고."

마음이 한 번 더 쿵 하고 내려앉는다. "혹이. 크다고요. 얼마나 그렇데요?" "5cm 정도 된다고 하더라. 혹 사이즈가 크니깐 줄인 이후에 수술하자고 하더라고."  더 이상 질문을 이어나갈 수 없어 형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동서 나 자궁암 3기쯤 되나 봐, 그리고. 약간 다른 곳으로 전이된 것 같다고 하네." 하면서 형님은 흐느꼈다. 나도  길거리에 서서 울었다. 괜찮다고 할 수도 없고, 힘내세요.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내가 들었던 최고의 위로의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3기에 전이도 진행됐다라니... 나또한 믿기지 않는데 형님은 오죽할까.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 유방암 항암치료 하는 과정을 읽고 나온 후라 가슴이 더 뛰었다. "대학병원 예약하려고"라고 하셨다. 하필 의료계가 뒤숭숭할 때라 내 수술보다 형님 검사가 예약이 안될까 더 걱정되었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네. 그래야죠."라고 울음이 또 터질까 봐 짧게 말했다. 그러면서 

"어버이날은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몸만 잘 추스르세요." "그래, 동서 부탁할게."라고 눈물범벅의 통화를 마쳤다. 암 환자가 더 이상 없길 바랐는데. 믿어지지 않는다. 


퇴원 후 며느리 걱정하고 계실 시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온 김에 옆에 사는 형님도  얼굴도 볼 겸 함께 저녁 먹자고 연락했는데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못 오겠다고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암 수술을 마치고 왔는데 옆에 살면서 못 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나보다 더 몸이 안 좋겠어.  안 좋으면 얼마나 안 좋다고 잠깐 와보지도 못한다고?.'라며 형님을 미워했다. 안 오는 형님이 야속하고 서운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얼마나 아팠으면 못 왔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나만 생각하며 서운하게 생각한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암 진단받기 한 달 전에 동생의 와이프도 자궁에 혹이 생겨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자궁을 들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올케가 안쓰러워 잘될 거라면서 펑펑 울면서 전화했었다. 

올케 자궁에 자리 잡은 혹이 무려 11cm였었다. 자궁을 들어낼 수도 있다는 우려와는 달리 다행히 자궁을 살리고 혹만 잘 떼어내고 현재는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는 중이다. 

"올케는 그래도 암이 아니라  다행이야. "라며 올케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냈었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그 올케가 생각이 났다. '올케도 그렇게 혹이 컸는데 암이 아니었잖아. 형님도 아닐 거야. 오진일 거야.'라고 나 혼자 생각한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호대차한 법률 스님의 기도라는 책을 읽으며 나도 기도한다. 

"우리 형님 잘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형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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