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On/Off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라디오를 켜는 것이다. 바쁜 아침, 시계를 보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노래와 코너를 듣다 보면 '아, 지금쯤 이 시간이구나' 하고 대충 감이 온다. 매일 같은 시간에 라디오를 듣다 보면 유독 마음이 멈춰 서게 되는 오프닝 멘트가 있다. 생각지도 못한 다정한 문장이 흘러나오고, 내 취향인 줄 몰랐던 노래가 나오면 괜히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든다.
오늘 라디오에서는 이런 사연이 소개됐다.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이 다 지나가 버렸네요. 계획했던 일들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1월이 다 가버린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았다. 사연을 듣고서야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DJ는 아직 괜찮다며 우리를 위로했다. 진짜 새해의 시작은 설이 지나고 나서라고, 지금은 아직 예열 단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다음 시간 라디오 DJ이 오프닝 멘트는 “힘든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건 퇴근 후의 맛있는 식사, 아이를 학원 보내고 혼자 마시는 라떼 한 잔 같은 소소한 순간들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순간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퇴근 후에 무엇으로 쉬고 있을까?' 쉬지 못하고 있었던것은 아닐까.
퇴근하자마자 아이 밥을 하고, 치우고, SNS에 올릴 사진을 정리한다. 운동을 하고, 낮에 못 한 공부를 하고, 책을 읽다 잠이 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쉬고 싶지만, 집안일과 '어제의 내가 세운 계획'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분명 내가 하고 싶어 시작한 일들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은 즐거움이 아니라 또 다른 '할 일(To-do list)'이 되어 있었다. 하고 싶은 것보다 이루고 싶은 게 많아 하루는 점점 버거워졌다.
몇년전 중요한 영상 촬영을 앞두고 평일에는 일하느라 바빠 주말 요리 연습을 하며 쉬지 못했다.
이게 습관처럼 굳어 지면서 퇴근후에도 주말에도 온전히 전원이 꺼지지 않는 느낌이다.
전원 버튼은 잠들 때야 겨우 눌린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지”라고 다짐해도, 머릿속은 끝내지 못한 숙제들로 소란스럽다. '이 시험만 끝나면', '이 논문만 끝나면'. 그렇게 목표를 달성하면 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일이 끝나면 이상하리만큼 헛헛해져 또 다른 바쁨을 찾아 나선다. 이런게 문제다.
브런치에서 영국인들의 여유를 다룬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주말이면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햇살을 온전히 느끼는 사람들 그들을 상상해보니 부럽기도 하다.
막상 아무것도 하지말고 누워만 있으라고 하면 나는 좀 쑤셔서 절대 못있을것이다.
(가만히 있는것도 힘든일이다.)
핸드폰 없이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았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이 따라붙는다. 이건 어쩌면 나 뿐 만아니라 현대인의 병적인 강박일지도 모르겠다.
라디오가 던진 질문 덕분에 생각해본다. 나는 오늘 어떤 소소한 힘으로 하루를 버틸까. 문득 어제 산 토피넛 라떼가 떠올랐다. 살찔까 봐 평소엔 입에도 대지 않던 단 음료를 어제는 너무 먹고 싶어 샀다. 양심에 찔려 반도 못 마시고 냉장고에 넣어두었지만, 출근하자마자 그걸 '에너지 부스터' 삼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에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요즘 나는 나에게 얼마나 친절한가?”
건강한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분명 나에게 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견디게 하는 것은 과연 친절한 일일까.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나를 위한 일이지만, 쉼 없이 나를 몰아붙이는 것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방법일까.
생각을 덜어내려 시작한 고민인데, 나는 또 이렇게 많은 생각으로 에너지를 쓰고 있다.
달달한 라떼를 마시니 뽀죡했던 마음이 살짝 누그러진다.
다이어트도 좋지만 역시 사람은 설탕을 먹어야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