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개월 만에 글을 쓴다. 연구와 강연, 정규수업, 살림까지 1인 다역을 하면서 나의 삶은 여전히 다람쥐 채바퀴처럼 굴러가느라 정신없다. 8월 초까지 무려 학술지에 두 개의 주재로 하나는 두 번, 다른 한 주제는 세 번째 재투고를 했고, 오늘 겨우 한편이 발행되었다. 다섯 차례의 국내외 학술세미나에 네 번의 발표와 한 번의 토론자로 참석했다. 하반기에 아직 국내 학술세미나 토론과 국제학술대회 발표일정이 남아있다.
매번 이번 주에는 브런치에도 한편 발행해야지 하다가 오늘에야 필을 들었다. 왜 그럴까? 요 며칠새 부쩍 브런치 작가로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생겼다. 아마도 연구와 강의, 삶의 고단함에 지쳐있어서 아주아주 주체적인 글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ㅎㅎ 아무튼 오늘의 주제는 아주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조지오웰과 푸코의 이야기다. 오늘은 독자 여러분들에게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위주로 이야기를 펼치고자 한다.
「동물농장」
웬만한 독자들은 아마 영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조지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을 알고 「동물농장」(1946)을 읽었거나 스토리쯤은 익히 알고 있다고 본다.
「동물농장」은 혁명을 통하여 인간을 내쫓고 농장의 주인이 된 돼지, 개, 양, 말, 닭 등의 동물들이 인간의 모든 것을 증오하면서 모든 동물이 평등한 세상 소위 ‘이상사회’을 건설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적 정서에는 게으름을 상징하는 돼지가 혁명의 주도자로, 독재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우화소설에서 돼지는 글을 읽고 쓴다는 것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서서 독재를 한다. 반대로 기억력도 나쁘고 글을 잘 모르는 동물들은 인간이 아닌 돼지라는 같은 동물에게 또 다른 착취를 당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오웰이 작품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권력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혁명은 주인만 바꾸는 것으로 끝날뿐 본질적 사회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이 권력계층과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질타할 수 있을 때에만 혁명이 성공한다는 것이다.
「동물농장」은 ‘권력과 지식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푸코의 구조주의 관점(「광기의 역사」 1961)을 증명해 주는 작품이기도 한다. 푸코에 대해서는 나중에 독립적인 한편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소설에서 돼지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높은 이유도 바로 권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이다. 우리 사회 지도층을 보라. 모두 명문대 정도는 나왔고 판검사, 변호사이력을 자랑한다. 즉 엘리트집단이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내가 조지오웰을 좋아하는 것은 유명한 작가라는 타이틀보다 자신의 작품세계에 당대 이러한 사회적 풍자를 과감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이방인으로서 나는 러시아문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사회통합, 다문화교육쪽으로 연구와 강의를 확장하고있다.
북한에서 온 내가 조지 오웰과 푸코가 꼬집었던 권력과 독재의 구조를 남한에서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학부시절 캠퍼스 안에서 의대교수는 타 전공 교수를, 공과계열 교수들은 인문계열 교수를, 인문계열 교수는 공과계열과 법학계열 교수를 비웃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본질은 저저마다 자기들이 잘났다는 거였다.
연구자 세계도 그렇다. 에휴
그런데 탈북민세계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 엘리트출신과 평민출신 등으로 양분화현상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음을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실감하고 있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한사람이니 이러한 논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와 미국 등을 떠다녔던 내가 한국에서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독재자들을 비웃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위치만큼 혹은 그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본성을 더욱 체감한다.
내가 시민인문학에 그토록 열광하고 강의와 연구에 애정을 붓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80~90년대 신자유주의와 경제 세계화의 세찬 소용돌이 속에서 노동력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변한 한국사회에 인문학 위기와 열풍도 벌써 30년을 넘어가고 있다.
이제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문화가우리 삶과 공존하는것은 불가피하다.
레비나스가 언급한 것처럼 자기 동일성을 고집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그 다름을 받아들일 때만이 비로소 함께 하는 사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천은 어렵다. 나부터도 당장 눈앞에 아프리카 여성을 보고 깜짝 놀란 적 있었으니까.
그래서 시민 인문학에 문화다양성 교육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단순히 높은 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엘리트만 향유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몇 달 전 시골 시민대학에 갔을 때 담당공무원이 다른 강사들은 모두 노인치매예방, 웃음치료, 노래교실 등을 다루는데 저만 톨스토이 문학을 주제로 잡아서 걱정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의가 끝나고 모든 분들이 정말 박수와 환호로 좋아해 주어서 깜짝 놀랬다나. 시골분들이라고 클래식하지 말란 법이 없지 않는가. (아래 기사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