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의 목표란
딜쿠샤가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제 너무 유명한 건물이 되어 새삼 소개는 필요 없겠고, 그냥 복원에 대한 생각만 풀어보려 한다.
일단 ‘보존’과 ‘복원’은 다르다 거칠게 말하면 보존은 현 상태에서 더 이상의 훼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복원은 조금 더 복잡한 개념인데, 어떤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까. 딜쿠샤는 아무도 보존이라고 하지 않고 복원이라고 하므로 거기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복원 후 공개되자마자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불이 났다. 대체적으로 불만이 많은 듯 하다. 특히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더욱 그렇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고, 시간을 지워버린 듯한, 등등의 내용이다.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즈에도 비슷한 맥락의 기사가 실렸다. (https://www.koreatimes.co.kr/www/nation/2021/03/177_304801.html?fbclid=IwAR3uN7IVBENA0wliQtLAi_1ED-pa7ZpPqZO5rXXEMjM0A_aL_aHzMsav-Rs) 국내에서 활동하는 영국인 기자인 Andrew Salmon 또한 'over-restoration'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이 기사에 대한 동조의 의사를 그의 페이스북에서 밝혔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만보다는 훨씬 더 표현이 완곡하다.
일단 이러한 논쟁은 매우 자주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요즘 유튜브에 보면 오래된 공구를 복원하는 동영상이 아주 인기다. 녹이 잔뜩 슬었던 공구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며 그 쓸모까지 회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는 분명히 치유적인 효과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복원'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드러난다. 어떤 사람들은 녹을 벗기고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며 쓸모를 되찾는 선에서 멈춘다. 그 결과는 충분히 근사하지만 새 것 같지는 않다. 반대로 원전히 새 것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거의 예외 없이 '동영상 잘 봤고 당신의 기술도 훌륭하지만 굳이 꼭...'와 같은 댓글이 달린다. 결국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은 복원에 대한 생각의 차이, 아니 '복원 철학'인데, 딜쿠샤도 같은 맥락인 듯 하다.
이 보다 좀 더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채플 창세기 천장화가 복원되었을 때 전 세계가 들끓었다. 그 색감이며 명암이 이전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내 눈으로 보기에도 세계적 명작이 이발소 그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복원 과정에서 원작에 대한 손상이 우려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https://en.wikipedia.org/wiki/Restoration_of_the_Sistine_Chapel_frescoes) 하지만 그 동안의 변색과 먼지를 제거하고 미켈란젤로가 그렸을 당시로 돌아가려는 노력이었다. 녹슨 망치와 세계적 예술 작품을 비교하기는 곤란하지만 근본 문제는 동일하다. 목원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 또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건축가로서 나는 대부분 신축 건물을 설계하지만, 있던 건물을 고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문화재가 아닌 경우, 내가 취하는 태도는 명확하다. '창의적 복원'(creative restoration)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점은 앞에 찍힌다. 어디를 바꾸고 어디를 남겨 놓을 것인가를 창의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여기서 '남겨 놓는다'는 꼭 물리적 현상 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개념, 상황 등 훨씬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까지 포함한다. 심지어 '원래부터 이랬어야 했을 것'이라는 판단도 서슴치 않는다. 지금 오래된 한옥 하나를 공사 중인데 내가 젊었을 때 실측을 하고 스케치까지 남겼던, 나에게는 정말 인생의 시계가 한 바퀴 돈 것 같은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지만 배치까지 싹 바꿨다. 경관이 좋은 땅인데 원래 집은 그 장점을 전혀 못 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장사 집의 한계다. 부재 일부를 재활용하는 선에서 결국 완전히 새로 짓고 있다. 물론 이런 접근 방식이 보존론자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 잘 안다. 그 결과물에 의해서 평가 받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시간의 흔적이 남을 것이다.
딜쿠샤의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단 이것은 공공 프로젝트였고, 기본적으로 문화재 복원에 준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완성된 결과물에서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려는 목적도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경복궁처럼, 딜쿠샤 또한 박물관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되는 상황이나 시점은 무엇이어야 할까. 결과를 놓고 보면, 건물 구조를 일부러 보여주는 곳을 제외하고는 테일러 가족이 여기 살고 있었을 때로 정한 것 같다. 복원 이전, 그러니까 불법으로 공동주거가 되어 있었을 때의 상태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랬다면 원전히 다른 종류의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결국 내 추측이 정확하다면 복원 팀의 기본 방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실제로 원래 집주인 가족이 살던 당시를 기준으로 했다고 치자. 집이라는 것이 살다보면 여기저기 낡기도 하고 파손도 된다. 영화세트라면 아무 고민없이 미술팀이 들어와서 소위 '앤티킹' 작업을 했을 것이다. 즉 일단 새로 공사를 해 놓고 다시 낡아 보이는 연출을 하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이 만족해했을까? 오래된 망치를 적절히 손 보는 정도로 할 수 있지 않았겠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복원 이전 딜쿠샤의 상태는 그러기에는 너무 파손이 심했던 것 같다. 망치 잘 고치는 사람들도 망치는 복원하지만 부러지고 갈라진 나무 손잡이는 새로 만들어 끼운다. 그 나무 손잡이를 굳이 다시 낡아보이게 해야할까?
나도 이 문제에 대해 똑 부러진 대답은 없다. 그러나 일단, 이 과정에서 수고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전시물을 보면 조사와 연구는 물론 당시의 기물을 다시 구하고 재현하기 위한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 같다.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는 것을, 다른 사례들을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들 덕분에 딜쿠샤를 이 정도라도 찬찬히 보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그냥 시간이 다시 작동하도록 기다리면 어떨까 한다. 그 어떤 노력도 '시간의 일'(Work of Time)을 이길 수 없다. 정말 복원 팀이 진정으로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했으면 그 결과물은 아마 보기 끔직했을 것이다. 한창 이런 문제가 문화재 쪽에서 거론되었을 때 일이다. 오래된 목조 문화재를 복원하는데 그 과정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새로 갈아끼는 부재는 원래 있던 것과 구별되도록 합성수지 등 아예 다른 재료를 쓰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럼 단청은? 새로 하면 '거짓'이므로 그냥 둔다. 그런데 이렇게 복원하면 그 건물은 영원히 누더기처럼 보일 것이다. 거의 물신화에 가까운 지나친 관념론이다. 요즘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다.
엉뚱하지만 딜쿠샤 복원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유지관리하고 전시물도 계속 보완해 나가는 것이 현재로서 최선이 아닌가 한다. 다만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을 벌일 때는 대강 다음의 기준 정도를 고민해 보면 좋겠다.
1. 복원의 기준 시점을 명확히 밝힌다. 그래야 비난을 해도 생산적으로 할 수 있다.
2. 건물의 장기적 내구성을 고려한다.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은 합리적으로 보수하고 그 원형 유구를 따로 전시하면 된다. 보는 사람도 그 정도는 구별한다. 건물은 도자기나 그림이 아니다.
3. 복원에 들어가기에 앞서 충분한 조사와 연구를 반드시 선행한다. 다만 설계할 건축가가 그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데, 현행 발주 시스템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문제다.
4. 사안에 따라서는 '보존'보다는 '창의적 복원' 쪽으로 관점을 이동해서 현재의 관점이 더해질 여지를 준다. 특히 건축물은 더욱 그렇다. 물론 그 결과물이 좋아야 한다.
5. 최고로 좋은 것은 그 건물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관리되어 온 후에 살짝 손만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로 옳고 문화적으로도 흥미롭다. (교훈: 건물 관리가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발 이 과정을 통해 박물관되는 건물도 좀 보고 싶다. 대부분 다 망쳐 놓은 다음에 거의 다시 만들지 않나.
써 놓고 보니 복원된 건물을 통해 고풍스런 분위기를 기대하는 분들께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글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고풍스런'이라는 것도 결국 단어 자체가 'fake'다. 오래된 건물도 유지관리를 잘 했으면 '고풍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세월의 무게와 낡은 것은 다른 것이다. 딜쿠샤가 억지로 화장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알고 보니 그 역사 자체가 그래서였다. 안타깝지만.
마지막으로, 당신이 원하는 것은 진실 그 자체인가, 감각과 취향의 만족인가?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