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6일 유민별(가명)과 나눈 이야기
(*인터뷰이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고 핵심 정보들도 적절히 변경합니다.)
마당은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는 곳 근처에 대체재가 있다면요.
저에게는 근처 공원, 천변 산책로, 사찰 같은 곳들이 그런 대체재였어요.
유민별. 지인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하고 외국 문물과 친숙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외교관이나 주재원 집안 출신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몇 년 간 해외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정도다. 삶의 대부분을 국내에서 보낸 사람이 그 정도의 국제적 문화자본을 축적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봄이 조금씩 완연해지던 어느 날 저녁, 서촌의 한 아담한 이태리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르스케타와 생선 요리, 그리고 남미 와인을 연료로 삼아 길을 떠났다.
1976년 도봉구 미아동에서 태어났다. 이 집에서만 무려 12년을 살았다. 반지하와 다락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코너 땅이었고 마당에 장독대가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중고등학교에서 기술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는데 이 집을 직접 지어서 이사 왔다. 반지하는 창고로 사용했고 다락도 잡지에서 보는 근사한 로프트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락에는 아버지가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만화책들이 쌓여있었다. 어린 유민별에게는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집 주소를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이런 모습이다. 여느 단독주택처럼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된 것이다. 그래도 정남향의 네모 반듯한 땅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988년에 이사를 두 번이나 갔다. 처음에는 지금의 수유리 드림랜드 근처에 전세를 얻어 갔다. 이 집에서 강아지 두 마리를 키웠던 기억이 나는데, 1년도 안되어 다시 떠나면서 남에게 주고 왔다. 그다음 이사 간 곳이 두 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우선 강을 건넜다. 유민별의 가족들은 대망의 강남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으니 상징성까지 있었다. 그 다음은 아파트로 이사 간 것이다. 강남하고도 잠실 야구장 근처의 아파트였다 이 중요한 사건 뒤에는 어머니의 꾸준한 재테크 노력이 있었노라는 솔직한 증언이 따라왔다. 역시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셨다. 많은 가정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패턴이다. 야구장 근처에 살았고 7회 이후에는 무료입장도 가능한 것을 알았지만 야구에는 취미가 없었다. 이 집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1994년에서 1996년 사이에 잠시 본고사가 부활했던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그 시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대학을 마치고 유민별은 좀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북 아프리카에서 살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신장하다 보니 젊은이들이 이런 경험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 덕분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교육대학 같은 곳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50평 형 정도의 주공아파트 같은 곳에 혼자 살았다. 월세를 700-800불 정도 냈던 것 같다고 한다. 이웃들은 보통 공공기관 근무 10년 차 정도의 직장인 가족들이었던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매우 여유있게 산 편이다.
대여섯 동으로 구성된 단지형 아파트였다. 6층짜리 였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자신은 4층에 살았다. 수위실 혹은 관리사무실 같은 곳에 가르디앙이라고 불리는 수위가 있었다. 일상에서는 불어를 사용했으나 장 보러 가서는 사투리 아랍어를 썼다. 지금도 아랍어를 읽을 수 있는데, 아랍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사투리 아랍어를 재미있어한다고. 이 곳의 집들은 난방을 하지 않는다. 겨울에 10도 정도의 기온을 유지하지만 습도가 높아서 춥게 느껴졌다. 그래서 전기장판은 필수다. 부얶에는 취사용 가스통이 있었는데 여기도 전화하면 배달을 해 주었다. 다만 엘리베이터 없이 4층까지 지고 올라와야 해서 보기가 안쓰러웠다고. 이 집은 넓은 것에 비하면 발코니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답답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라고. 근처에 해변이 있어서 그걸로 충분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좀 독특한 데가 있다. 그리고 이후 유민별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북아프리카에서 귀국한 유민별은 다시 잠실로 돌아와 2007년부터 현재의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가족들은 차근차근 부동산 재테크를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과 2011년 사이의 어느 즈음에 대한민국 주거 부동산 재테크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타워팰리스(3차) 진입에 드디어 성공한다. 이미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러한 노력에 더 이상의 반대 없이 묵묵히 동조하는 입장이 되었다. 지금도 부모님은 이 '21세기의 무릉도원'에 매우 만족해하며 살고 계신다. 아마도 그 세대에만 가능했던,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성공 사례였을 것이다. 직접 살아보니 타워팰리스는 항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환기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고 살기에 정말 좋았다. 엘리베이터도 많고 무엇보다 매 층마다 쓰레기 수거하는 곳이 있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한다. 이곳 역시 발코니가 없었지만 바로 옆이 양재천이라 그리 답답한 줄 몰랐다.
2014년에 회사 일로 잠시 남미에 가서 살았다. 여기서도 잘 사는 동네의 50평 정도 되는 큰 아파트에서 살았다. 방이 3개에 화장실이 2개였고 심지어 하인 방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에게는 그리 좋은 집이 아니었다. 도시가스가 들어와 있어 더운 물은 잘 나왔는데 역시 난방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곳 아파트에는 욕조가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유민별이 살던 집은 집주인이 추가로 공사를 해서 옥조가 있었고, 그 때문에 그곳으로 결정을 했다. 아마도 욕조를 그 문화권에서 일종의 력셔리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한다. '왜 그럴까'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문화적 문제에 대해서는 합리적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본 사람 특유의 개방적인 태도인 듯하다. 건물 관리나 운영 측면에서 북 아프리카가 여러 모로 허술했던 것에 비하면, 남미의 이 나라는 훨씬 더 체계적이었다. 이 아파트 역시 발코니가 없었지만 남미 최대의 공원인 Ibira Puera가 바로 옆이라 역시 별 문제 없었다.
2916년 독신인 채로 독립을 해서 타워 팰리스 근처의 아카데미 스위트에서 살았다. 어느 모로 보나 타워 팰리스보다 급이 떨어지는 건물인데 오히려 관리비는 더 나와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후 대림 오피스텔의 10평형대 방에서 임시로 두 달 정도 살다가 2020년 3월에 삼성역 부근의 미켈란 아파트로 와서 현재까지 살고 있다. 근처의 봉은사를 자신의 마당 삼아 지내고 있다. 살아 보니 확실히 생활 인프라 면에서 강남이 편리하고 좋다고 생각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만족스러우나 오래된 아파트라서 주차장이 기계식이고 전기차에 대한 대책이 없는 것이 문제다. 다행히 관리사무실에서 인지하고 있지만 어떤 해결방법이 있을지 궁금하다고.
유민별은 살아 보니 확실히 생활 인프라 면에서 강남이 편리하고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년기를 제외하고 계속 강남, 혹은 외국에서 살아왔으니 친숙함이라는 변수가 어느 정도 있을 수는 있겠다. 집에서 주방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아직 독신이고 주방이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결혼하면 배우자가 요리에 취미가 있느냐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고 한다.
유민별의 주거사가 언뜻 보기에는 별천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부모 세대의 재테크와 자식 세대의 부단한 사회생활이 맞물린 결과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차례의 외국 경험 또한 대한민국의 국력이 신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있을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 오히려 마당 있는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당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주변의 공공 옥외공간이 충분하면 내 집안에 마당이나 발코니 같은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그 이전의 세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어쩌면 유민별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도시인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을 목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