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저편
그때도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76.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얗게 지워진 기억의 저편이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고향집 앞마당에서
누이와 말도 안 되는 일로
씩씩대며 다투던
겨울방학이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넓은 들판이 통째로
함박눈 속에 묻히고
휘어진 나뭇가지 끝에는
까치가 홍시를 쪼아 먹고 있었다.
긴긴 겨울밤
쩡쩡 앞산이 얼 때
멀리 동구 밖에서 달려온 바람이
문풍지를 연신 두드려도
시래기를 삶는 방은
훈훈하고 따뜻했는데
할머니가 구운몽 책을 들고
호롱불 밑으로 다가와 앉으며
혼잣말을 하신다.
나는 화롯불을 뒤져 고구마를 찾고
누이가 자투리 실 챙겨 놓은
실꾸리를 감아
털장갑 한 짝씩 뜨개질을 시작하면
닭이 두 회나 울고서야
할머니는 책을 덮고
건넌방으로 돌아가셨고
남매는 이불 한 채 발등 포개 덮고
달콤한 잠이 들었다.
할머니는 신새벽부터
저녁에 태운 아궁이 재를
삼태기에 담아
잿간에 갖다 붓고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솥에 물 데우는 소리
구수한 된장국 냄새
자반고등어를 굽는 냄새는
긴긴 겨울밤 뒤끝의 시장기로 충만했다.
누이 성화에 못 이겨
아침 일찍 눈곱만 떼고
눈이 쌓인 마당을 쓰는데
싸리비가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어둠의 부스러기들
지난밤 내내 머뭇거리던 발자국들
반짝이는 햇볕 알갱이들이
시원하게 쓸려 나가며
길을 만든다.
스치는 실바람에도
삐걱대며 열고 닫히는
시누대로 엮은 사립문을 나서
뒷산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야트막한 고개를 넘고
멧돼지가 산다는 깊은 골짜기로
동갑 나이 당숙과 함께
지난밤 내린 폭설에
무릎까지 푹푹 빠져가며
나무를 하러 간다.
도시사는 놈이
무슨 땔감을 한겨울에 구한다고
길 잃은 강아지처럼 산속을 헤매다
꽝꽝 얼어붙은 삭정이에
청솔가지 한 움큼 꺾어
지게에 달랑 지고
온 마을 골목골목 번져가는
밥 짓는 연기를 바라보며
어스름해지는 산길을
그렇게 내려왔는데
어쩐 일인지
그 다음 생각이 도통 나질 않는다.
문풍지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에
가만가만 호롱불 심지를 키우고
구운몽에 빠졌을 할머니
누이는 한 짝 남은 뜨개질을
마저 했을 것이고
주책없는 수탉은 또 한밤에 울어
모두를 깨웠을 텐데
생각을 쥐어짜고 끙끙 앓아도
왜 기억은 거기까지 일까?
그렇게 끊긴 그날 밤은
언제 떠난다는
어디로 간다는 귀띔조차 없이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의 갈피로 사라졌다.
굴뚝의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잡아도 잡아도 잡히지 않는
추억은 잃어버렸지만
부재의 흔적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까마득히 잊었던 생각의 끝에도
더듬더듬 찾아야 할
기억이 있다고 믿으면서
밀린 숙제를 하듯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데
멀리 빌딩 옥상에서
하얀 난방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아득한 그리움이
하늘에 제 이름을 새기는 것처럼
기억의 저편 210mmX135mm, Woodcut Print on Paper(Croquis Book),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