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담벼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피트리 Feb 07. 2022

추억, 기나긴

--- feat 재크 그리고 하쿠

넌 니가 호랑이라 생각하지?

엄만, 아들이라 생각해


비밀 한 가지 알려줄까?

지금은 고양이 두 녀석과 아웅다웅 지내지만

내겐 가슴 속 깊은 추억이 있어

만일,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셰퍼드와 진도견을 키울 거야


#1. 네 이름은 재크

옛날, 우리집에는 셰퍼드가 있었어

암컷 셰퍼드가 어린 내 눈에도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몰라.

엄마는 셰퍼드가 암컷이라는 이유만으로 '재클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어 이름이었으니까.

시골 강아지들의 서양식 이름이 대세이던 시절이었어

시골 개의 3할은 해피, 또다른 3할은 메리, 나머지는 도끄(dog)이기 마련.

우리집 셰퍼드는 재클린이지만, 나와 동생은 혀가 짧아서 재크라고 불렀어

내가 그 즈음 떠듬떠듬 읽던 동화책이 <재크와 콩나무>였거든


#2. 동행

우리는 유치원까지 늘 함께 걷곤 했지

재크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유치원 마당에 조용히 엎드려 있었어

내 몸집보다 큰 재크와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였지

여자 아이가 위험에 빠졌다는 편견과

큰 개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편견

재크는 간혹 날아오는 호통 소리와 위협적인 몸짓, 어떤 날엔 돌멩이까지도

몸으로 막아주었어. 

나를 보호하려는 동행의 목적을 짐작하면서도 설명해줄 수 없었지.

"되레 네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비칠 수 있단다"

재크를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거든     

아무리 문을 꽁꽁 닫아놓고 몰래 빠져나와도

대문을 뛰어 넘어서 끝내 등원길을 지켜주었던.


#3. 이별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이 온순했지만

재크의 사냥 본능만은 완전히 숨길 수 없었지

어느날 이웃집 닭을 물어 오는 일이 생겼거든

자신이 획득한 전리품을 의기양양하게 마당에 내려놓았을 때

혼비백산한 엄마에게 볼기짝을 맞기도 했던가.

왜 야단맞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재크는 오해하였던 것 같아

그래서 급기야 이웃이 야산에 방목 중인 염소를 사냥하기에 이르렀어

가족에게서 칭찬받을 수 있도록 보다 큰 전리품을 찾았던 거지.

그 사건 이후

나는 재크를 볼 수 없었어

울면서 혼자 등원해야 하는 날들이 쌓여갔어


#4. 두 번의 재회

어느날엔가  멀리서

꾀죄죄한 개 한 마리가 목줄을 끌면서 걸어오는 것을 봤어.

한눈에 알아본 재크의 눈빛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염소 사건 이후, 더이상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엄마 아빠는 재크를 수십 킬로 떨어진 양떼 목장으로 보냈던 거야

재크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채워진 목줄을 울부짖으면서 물어 뜯어내고는

용케 집으로 돌아왔던 거지. 그 머나먼 초행길을 어떻게 더듬어 찾아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었지

목장 주인이 들이닥쳐 재크를 끌고 갔지만

한참 뒤 다시

재크는 목줄을 끌며 돌아왔어

두 번이나 탈출하자 목장 주인은 재크의 목줄을 아예 쇠줄로 바꿔버렸다는 풍문이 들렸지

그 이후로는 재크를 볼 수 없었어

한 번도

한 번만이라도


#5. 후회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나는 근본적인 알레르기를 갖고 있어

도무지 내 인생에 쓰임이 없는 단어라는 생각 있었지.

한 입 베어 물면 신물 차오르는 풋사과처럼 입에 올리는 순간 그리움은

저 스스로 설익은 추억을 줄줄 흘리며 잠겨버리니까

그렇지만, 재크를 떠올리면 나는 도무지 그것을 거부할 수 없게 되지.

가슴에 묻지 못한 추억은 목울대에 턱 걸린 채

삶의 끝까지 신물 흘릴 것 같아


#6. 합리화

아버진 왜 목줄 매지 않고 재크를 키웠을까?

목줄을 매는 미안함이 이별보다 더 힘들었을까?


그때, 재크에겐 돌아올 우리 집이 있었지만

나에겐 돌아갈 추억조차 없어

쑥덕 잘려나간 추억은 양쪽 끄트머리를 찾아 이을 수도 없는 것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오래도록 목줄을 질질 끌며 여태까지 함께 걸어온 옛 기억이

그리움의 빨간 사과를 내민다.

나의 원소들은 언젠가

재크의 원소들과 만나 함께 누런 흙길 너머 나부끼겠지


어쩌면 보호소에서 하쿠를 처음 봤을 때 가슴 짠했던 기시감은

재크의 눈빛 한 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나는 곧장 하쿠를 끌어안았지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이야말로 진심을 내포하는 게 아닐까

합리적 이유는 타당하지만 후회를 남기고

진심은 타당치 않기에 후회를 남기지 않아

결국, 모든 합리화는 3분간의 자기위안일 따름이란 걸





   


 






매거진의 이전글 올바른 순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