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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트리 Jun 09. 2022

K남매의 타투

   ---- 서로를 닮은 서로를 담은

누구나 자신의 추억이 확고한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이미 감정의 영역으로 이동해버렸으므로 그것이 추억이라 불린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 채.

다시는 저질러지지 않을 한때의 ‘사실’, 추억의 내용물이다.     


직접 경험했으면서도 차마 사실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추억이 있다. 그것은 작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연이 겹치면 우연이 아니게 되는 것.  내가 목격했던 우연들은 신기루 같았다. 흐릿해진 기억 속으로 걸어가면 손 흔들며 더욱 멀어지는 아득함. 그것은 앨범에 꽂히지 못한 채 나뒹구는 빛바랜 스냅사진을 닮아 있다.     

K와 나는 고등학교 시절 절친이었다. K는 누구보다 쾌활하고 사교적인 모범생이었으므로 그녀가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 비밀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내가 지켜줘야 할 그녀의 상처. 그 상처가 친구의 것이 아니라 내것이라고 믿어지게 될 즈음 우리는 졸업을 했고,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푸르렀던 봄, 화사한 어느 오후였다. 쭈뼛거리며 캠퍼스를 걷고 있는 청년과 우연히 마주쳤다. 한눈에 보기에도 앳된 얼굴의 청년은 이따금 걸음을 멈춰 학생들과 간단히 대화하곤 하였다. 어느샌가 내앞에 멈춰선 청년이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스물두 살, 000이라는 사람을 아세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청년의 간절한 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K의 이름을 들었다. “왜, 그 사람을 찾고 있나요?” 청년이 대답했다. “제 누나예요… 꼭 한 번 보고 싶어서…”

설마, 그럴 리가. 동명이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K에게 전했을 때 그녀는 하얗게 질려서 후들거렸다. “…내 동생, 엄마가 날 버리고 갈 때, 떼놓지 못해 데려간 남동생이… 있었어…”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캠퍼스에 출몰하였던 청년은 마침내 K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어색해 했으나 이내 뜨겁게 포옹하고 감격하였다. 하지만 전쟁세대도 아닌 우리에게 벌어진 그 일이 정작 내게는 개연성이 한참 떨어지는 시나리오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당황스런 재회 뒤, K남매는 살뜰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겼다.       

그때, K가 왜 점집에 갔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어깨가 짓눌려서,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무당은 어린 여학생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뜸 소리쳤다. 

왜 젊은 남자를 달고 다녀?”


온갖 수소문 끝에 동생의 부고를 전해들은 K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펑펑 울며 후회했다.

“그애는 자신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피할 수 없는 사고가 곧 닥칠 거라는 걸. 그래서 날 담아가려고 찾아 왔던 걸까?”      

K에게서 울먹이는 하소연을 들었지만, 나는 자초지종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벌어진 우연들이 더욱더 신기루가 되어 증발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예감했다. 내가 지켜줘야 할 그녀의 상처들이 너무 커져 있음을.

K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키면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K의 상처들은 비밀로서 잊혀져야만 한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많은 비밀을 공유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K에겐 되레 내가 상처의 캐비넷으로 보일까봐 두려웠다.       


푸릇한 계절에 서면 K남매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눈동자의 간절함이란 그런 것일까.

서로를 닮은, 서로를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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