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갑다
나는 잘 모르는데, 지금으로부터 38억년 전에 지구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38억년 전이 아니라 20억년, 10억년, 1억년 전이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왜냐하면 '지구 생명체의 최초 탄생 시점' 따위는 내 생활과 아무 관련이 없을뿐더러, 나는 그 주장을 직접 검증할 동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즉 '그러든가 말든가'다. 자칭 과학자란 양반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사실 최초의 생명체가 100억 년 전에 등장했습니다, 200억 년 전에 등장했습니다, 하고 지껄여도 나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말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태어나서 걷기 시작할 무렵 하늘을 가리키며 "아빠, 저 빛나는 공은 뭐고 왜 자꾸 움직이는 건가요?"하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응, 저건 신의 축구공이고 신이 축구를 하는 동안 이리저리 움직이는 거란다."하고 대답해도 그런가 보다 할 것이다. 온 마을 전체가 태양이 신의 축구공이라고 믿고 있다면 더 그럴 것이다. 더 나아가, 온 나라 전체가 그렇게 믿고 있다면 의심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나는 실로 게으른 인간이다. 나는 태양이 지구를 돌든, 지구가 태양을 돌든 관심 없는 사람 중 하나다. 16세기에 교황이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하면 '그런갑다'할 것이고, 19세기에 과학자가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해도 '그런갑다'할 것이다. 나는 갈릴레이가 아니다. 다윈이 아니다. 플라톤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다. 나는 남들이 믿는 것을 믿는다. 나는 그저 '그런갑다'한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만 있었다면(그리고 실제로 아주 많지만)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말은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만 있었다면, 인류는 신비주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극소수에다가 때로 신변의 위험까지 감수한)은 기어코 '왜 그런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답을 찾으려 했다. 그들은 '어떻게' 다음에 '왜'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는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까지 '그런갑다'하고 살았지만, 나라고 호기심이 말살된 인간은 아니다. 가끔 나도 모르게 '왜 그런가'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다만 그 질문에 답하려면 정신을 집중하고 귀찮은 일을 지속해야 하기 때문에, 그냥 다시 소매 속으로 집어넣곤 했다.
보자, 보자, 한 번 보자. 내가 과연 '그런갑다'형 인간에서 '왜 그런가'형 인간으로 바뀔 수 있을까? 앞으로 '왜 그런가'형 인간들이 한 말과 행동을 죽 연구해 볼 예정인데, 그러다 보면 나도 바뀔지 모르겠다. 듣자하니 그리스란 곳에(사실 어쌔씬 크리드 오디세이에서 꽤 많이 접해봤다) 이 '왜 그런가'형 인간들이 많았다는데 다음 글에선 거길 한 번 가 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