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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는 쥐

전인(whole person)이란 무엇인가

김기태의 단편소설 <보편 교양>을 읽고

by 생각하는 쥐

김기태의 단편소설 <보편 교양>을 읽었다. 지난여름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었는데 생각난 김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읽어 보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교장의 이 한 마디로 압축해서 설명할 수 있다. "다행이네. 전교조 교사, 수업중 마르크스 읽혀. 이런 기사라도 나봐. 작살난다." 어떤가. 흥미롭지 않나? 아주 재미있다. 고전읽기 수업을 담당하던 '곽'이 별안간 사상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학부모에게 항의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소설이다. 그렇지만 그 갈등이 너무 빠르게 봉합되는 바람에 이 갈등이 소설의 주 소재라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갈등을 좀 더 중심적으로 다루었더라면 더 재밌었을 텐데. 그건 아쉽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잘 쓴 소설이다. 생각해 볼 점도 많았다.


곽은 학생들에게 고전을 소개하고자 했다. 그는 교사로서 오직 대학 입시와 그를 통한 부와 권력(또 행복이라고도 읽는다) 쟁취에 매몰된 학생과 학부모, 교육관료들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과연 무엇을 가르치는 건가. 이게 정말 제대로 된 교육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던 참에 고전읽기 교육을 맡아 학생들에게 '인간으로서 필요한 보편 교양'을 배우는 기회를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곽의 생각보다 열정이 없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자거나 입시를 위한 공부를 하는 곽의 수업 속 풍경은 오늘날의 교육이 학생들을 탈진, 혹은 조급함으로 밀어넣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잠에 빠져드는 학생들에게 곽의 수업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당장의 잠이 더 중요했다. 곽의 수업 시간에 입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쓸데없는 소리'나 늘어놓는 수업보다 자신이 더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피차일반. 두 부류의 학생들에게 곽이 이야기하는 고전과 보편 교양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우리 교육의 적나라한 단면을 보여준다. 즉 교실 속 학생들은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다. 그들에게는 감성이 없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페기되는 기계처럼 그들은 일한다. 그러나 곽은 서두르지 않는다.


"이 수업을 듣지 않는 게, 혹은 어떠한 학교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게 부와 권력만을 추종하고 소수자를 배척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불량배로 성장할 거라는 뜻은 아니었다. 노동 착취에 시달리며 형벌 같은 생존을 이어가지만 어떤 비판 의식도 벼릴 수 없는 죄수가 된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었다. 학교에서 잘 배워야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은, 제도교육에서 '모범적인' 성취를 얻어서 삶의 기반을 마련한 자신 같은 교사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 아닌가.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라는 지도는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 아니냔 말이다. 곽은 일리치, 부르디외, 푸코 등을 떠올리며......어떤 지도도 하지 않았다."


곽의 독백을 읽다 보니, 공교육에서 국가 사업의 도구 이상의 교육을 기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교육은 필연적으로 국가 경제발전에 필요로 하는 인적자원을 키우는 사업 아닌가. 그 사업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어찌 보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에 맞게 공교육이 왜곡되는 것 역시 당연해 보였다. 사회 전체를 발전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간을 생산하는 것이 공교육의 전부가 아닌가 하고. 그렇다면 제대로 된 교육은 학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국가가 행하는 교육이 아닌 사회가 행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는 동의어가 아니다. 국가는 일종의 장치이며 때로 사회에 반하여 움직인다. 따라서...도구 이상의 교육은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나만 해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식들은 학교에서 배운 바 없었다. 학교에서는 고통과 숫자 몇 개를 배웠을 뿐이다. 그것들은 모두 책에서 배웠다. 선대의 학자들이 쓴 책. 결국 나는 스스로 교육했다. 그리고 성장했다.


곽의 수업이 실망만 가득했던 건 아니었다. 몇 명의 학생들은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그중에 '은재'가 가장 열심이었다. '사상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쳤다고 항의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만큼 수업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비록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곽은 은재에게 마르크스를 쥐어주었다는 데서 뿌듯함을 느꼈다. 그녀가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는 기쁘기까지 했다. 아직 이 나라의 교육이 죽은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다만 그녀가 입시 컨설턴트의 컨설팅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허탈해하기도 했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이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공교육에서 '인간에 대한 교육'을 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교육이 어떤 필요도 없는 사회악은 아니다. 다만 융통성이 필요하다." 어쩌면 진정한 교육은 스스로를 교육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곽이 은재를 교실에 앉혀 놓을 수는 있었어도 마르크스에 관심을 가지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은재가 스스로의 호기심으로 마르크스를 펼친 것이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언젠가 스스로 자신들만의 마르크스를 펼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성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무 구조(수직적 구조)로 모든 것을 조직하고 교육에 맞는 나이와 직장에 취업할 시기까지 규정하지만 이것이 역효과를 내고 있을 수도 있다. 조금 더 리좀 구조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관리하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는 관리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세계는 음미해야 하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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