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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는 쥐

역사적인 삶을 살아라

김명인,『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를 읽고

by 생각하는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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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는 나를 빨아들였다. 책을 펼치자마자 앉은자리에서 수십 쪽을 읽어내렸다. 1부 ‘나의 대학’과 2부 ‘안개의 숲, 무림’은 그야말로 대작 소설 한 편을 읽는 듯했다. 저자를 포함한 회성록 속 등장인물들이 보여준 불굴의 투지와 용기가 놀라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었다. 저자가 직접 겪어내고 묘사하는 1979년과 2024년 사이 격동의 한국사는 내 몸과 마음을 전율케 했다. 그러나 3부에 접어들며 날씨가 달라졌다. 1부와 2부가 폭풍우 이는 날씨였다면, 3부는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날씨를 연상케 했다. 잔잔하지만 그래서 더 무거운, 침묵의 날씨. 책을 덮을 즈음에는 감동이 아니라 의문이 들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저항하던 저자는 1991년 이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격동은 없었다. 그저 한탄만 있을 뿐. 저자뿐만이 아니었다. 한때 온 나라를 뒤흔들고 끝내 이 사회에 혁명을 가져올 것 같았던 변혁운동세력 전체가 1991년을 기점으로 사라졌다. 대체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8월 며칠쯤이던가, 종종 읽던 ‘한겨레’ 신문의 ‘책과 생각’에서 『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 출간을 소개하는 기사를 발견했다. 책 제목부터가 눈길을 끌었다. 독재 정권 시절 공안사건 주범으로 옥살이까지 한 저자의 회성록이라. 흥미가 동했다. 곧 읽으리라고 다짐한 지 한 달쯤 지난 9월 초순 책을 구해 펼쳤다.


“와….”


1부를 읽고 책을 덮자마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저자의 대학 시절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였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독재자의 폭압에 짓눌린 한국사회. 소설 『1984』마냥 정보기관 요원들이 촘촘히 깔린 대학. 그리고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죽은 공기. 그러나 마치 어둠 속을 헤치는 등불처럼, 어둠에 순응하길 거부한 학생들. 그들은 스스로 모임을 조직해 금서를 읽으며 어둠 너머 세상을 깨우쳤고 어둠 깔린 세상에 빛을 가져오고자 했다. 싸움은 처절했다. 빅 브라더를 방불케 하는 감시와 탄압 속에서 수시로 잡혀가 고문당하고 투옥되면서도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저항운동은 점차 격렬해지기만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그 시절을 살았다면, 나는 그럴 수 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점점 고조되어가던 저자의 저항운동은 마침내 <반파쇼 학우투쟁선언>이라는 문건 작성 혐의로 입건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의 대면을 거쳐 일명 ‘무림사건’의 주범 중 하나로 짧지 않은 옥살이를 한다. 책에 저자가 쓴 옥중서신 일부가 실려 있는데 그중 특별히 인상적인 부분이 두 군데 있어 옮긴다.


인간이 진정으로 주체적이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상황을 역사적‧구조적으로 명확히 파악하고, 그 상황 속에서의 인간의 의미를 이해하며, 이러한 전체적 관련 속에서 자기 행동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앎을 통해서 다시 행동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한에서 진정 역사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 행동‧행위를 부단히 역사화시키는 능력이야말로 주체적 인간 제일의 덕목일 것이다. …합리적인 세계 인식과 그에 따른 정당한 실천은 이 세계가 나라는 인간에게 부과한 벗을 수 없는 짐이기 때문이다(264쪽).


이 문단을 읽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요즈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나에게 너무나 와 닿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맞다. 어디로 갈지 알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한다. 즉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또 자신이 세계 역사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이해하고 그 맥락에서 자신의 의미를 고찰해야 한다. 따라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역사를 돌아보는 삶이다. 역사를 이끄는 삶이다. 역사적인 삶이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


두 번째 인용 문단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3세계 사회과학이 우리의 분단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분단 문제는 우리 시대 우리 역사의 당면 최고 최대의 문제이고, 우리나라에서 모든 역사적 노력은 분단 문제를 정 점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실천은 그 잘못 설정된 목표 때문에 결코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이 분단 극복 과학의 수립과 발전은 바로 우리 세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뿐만이 아니라 인류학, 언어학 등까지도 이런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고 아직 전혀 감을 잡을 수는 없지만 철학도 문제가 될 것이다. 주체적인 과학을 수립하는 일!(273쪽)


분단 문제에 관심이 큰 나에게 이 문단 역시 각별히 다가왔다. 특히 “분단 문제는 우리 시대 우리 역사의 당면 최고 최대의 문제이고, 우리나라에서 모든 역사적 노력은 분단 문제를 정점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와 닿았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그 여러 이름 중 ‘분단 체제’라는 큰 이름 하나를 가지고 있고, 또 이 이름표가 어떻게 붙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인식한다면,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은 그 다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적인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면 분단 문제를 우리 중심 과제 중 하나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2부까지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3부부터는 날씨가 급변한다. 1, 2부에서 저자의 청춘을 지배하던 ‘혁명의 희망’은 사라진다.


그러나 1987년 12월 17일 아침 이후 서울의 공기는 어딘가 달라졌다. 기압 배치가 바뀐 것이다(347쪽).


박정희 정권에서 무르익어 전두환 정권에서 최고조에 이른 이 땅의 변혁운동세력은 단순히 독재자의 퇴진과 민주제 전환만을 외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 전체가 변혁하기를, ‘민족민중민주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열망은 일부 지식인 계층의 열망만이 아닌, 시대의 열망이었다. 한국 전체의 열망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그런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재자 하야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가장 큰 고비를 넘어 고지를 향해 달려가던 엔진에 동력이 뚝 끊겼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로써 1980년대를 관통하며 낭만적 자가발전의 힘으로 민중민주 혁명의 대오를 유지해오던 ‘변혁운동 세력’은 여전히 철모르는 과격 ‘운동권’으로 남거나, 아니면 ‘객관적 충격과 주관적 자멸’의 과정을 통해 청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전까지 나라를 구하는 민주투사들로 존중받던 ‘변혁운동 세력’은 이 무렵부터 대중의 감각과는 동떨어진 과도한 요구를 하는 특수 집단, ‘운동권’이라는 이름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직선제 개헌과 삼저 호황, 현실사회주의권 몰락과 북방외교의 성공 등 지배블록의 성공적인 자기개편과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현실 상황의 극적인 변화 앞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권’의 오랜 꿈은 더 이상 전진할 동력을 잃게 된 것이다(351-352쪽).


저자는 그 이유를 깊게 파헤치지 않는다. 다만 백승욱이 저술한 『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을 인용하며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다. 대다수 민중은 정치 민주화와 높은 임금 상승이라는 두 성취에 만족했다고.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고. 대다수 민중이 거기서 안주했기에 혁명은 동력을 잃고 사라졌다고. 지지를 잃은 변혁운동세력의 해체는 당연한 결과였다고. 그러나 나는 이 설명에 만족할 수 없다. 정말 한국사회의 총체적 변혁, ‘민족민주민중 혁명’은 그저 운동권 인사들의 바램이었을 뿐 다수 민중의 뜻은 아니었던 걸까? 민주화를 위해 싸울 때는 변혁운동이 ‘시대의 정신’이었으나, 민주화 이후에는 그에 반했기에 자연히 퇴조했을까? 납득하지 못하겠다. 뭔가 냄새가 난다. 뭔가 더 있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지만, 나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을 읽어보고 다시 논하겠다.


저자는 당시 자신을 비롯한 운동권의 사회인식을 ‘낭만적 시대착오’라 불렀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헛된 몽상에 잠겨 있었다는 뜻이다. 그 꿈이 깨진 충격이 지나치게 컸던 탓일까, 1991년 이후 저자의 삶은 그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변혁운동세력을 이루었던 젊은이들 대부분이 흩어져 살길을 찾은 것처럼 저자 역시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으나, 좀처럼 길을 찾지 못하고 심히 우울해하며 방황한다. 그 과정에서 잡지 편집장도 맡고 대학교수 직함도 달았으나 내가 느끼기에 저자는 1991년 이후 ‘역사적인 삶’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온 듯하다. 물론 이는 객관적인 평가도, 절대적인 평가도 아니다. 내가 어찌 글 몇 자 읽고 그의 인생을 단언하겠는가. 다만 3부를 이루는 글의 행간에서 저자의 방황과 우울, 그리고 회한이 깊게 묻어나옴을 느꼈다. 그는 이제 별로 바라는 바가 없다고 한다. 혁명의 꿈도 사라졌고, 이제 그저 조용히 꼬물거리며 사는 게 전부라고. 한때 불타던 청년이 조용히 식어간 듯해서 아쉽다.


아무튼 저자가 본인의 생을 이렇게 열심히 글로 써주었으니, 나 역시 그의 부름에 응답해야 마땅하리라.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지나간 세대가 전하는 성찰의 기록이자 부끄러운 손길로 내미는 공감과 연대의 제안으로 읽힐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16쪽)”고 했다. ‘젊은 세대’인 나는 ‘지나간 세대’가 내민 성찰의 기록을 들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역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단순히 단절된 한 순간을 살아가는 개인이 아니라, 앞과 뒤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사의 길을 걷는 주체임을 인지해야 한다. 이런 인식을 갖는다면 ‘나 자신’에만 맞춰져 있던 초점이 서서히 더 넓은 범위로 이동한다. 그때야 비로소 역사적인 인간에게 내려진 여러 임무들을 자각하고 수행할 수 있겠다. 윗세대의 실패와 성공을 분석하고 현 시대에 맞게 고치는 일은 그 기본이다.


둘째, 윗세대가 쟁취하여 물려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윗세대는 끈질긴 투쟁 끝에 정치 영역에서 민주제를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 제도는 지금까지도 상당히 잘 작동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자동장치가 아니다. 보수와 개선 없이 돌아가는 기계장치는 언젠가는 고장나기 마련이다. 혹은 누가 발로 찼을 때 우지끈 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민주주의라는 장치를 계속 수리하고 개선할 의무가 있다.


셋째, 분단체제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분단체제 위에서 태어나 분단체제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다. 서로를 증오하는 두 정치 집단으로 이루어진 적대 체제가 얼마나 해로운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분단체제를 해소해야 한다. 꼭 물리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에 못 미치더라도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는 해소되어야 한다. 남정이든 북진이든 무력통일은 허황된 망상이다. 왜냐하면 무력통일은 반드시 전쟁을 의미하고, 전쟁은 분단체제를 강화할 뿐, 이를 해소할 방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윗세대는 분단을 막지 못했고, 이후 노력했음에도 분단 체제를 해소하지 못했다. 그사이 분단 체제는 일시적인 상태를 넘어 영구화되었다. 이제 국민 절반 이상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1]. 그렇다면 통일은 하지 못하더라도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는 우리 세대의 몫이다.


위 글이 『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를 읽은 내 소감이다. 마지막으로, 책에 실린 <반파쇼학우투쟁선언> 전문을 싣겠다. 그 글이 완전히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역사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내 또래 젊은 시민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이기 때문에 싣는다.


반파쇼학우투쟁선언


이 땅의 민주주의는 과연 죽었는가? 한 줌도 채 안 되는 반민족 파쇼지배집단의 물리적 탄압과 파시스트 언론의 조직적인 선전 음모에 의해 그 정신을 압살당하고 있는가? 일껏 축적된 투쟁 역량은 이대로 와해되고 말 것인가? 혁명적 열기와 반동적 폭압의 크나큰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도 의연히 자리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가? 이제 역사는 우리에게 지난날의 투쟁을 통절히 반성하고 변화된 상황에 응전하는 우리의 새로운 자세 확립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싸움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싸워야 적의 숨통을 철저히 조일 수 있는가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투쟁을 위한 몇 가지 이해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적은 누구이며, 그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의 명백한 적은 민중의 포위공격으로부터 기본적 수탈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국내의 매판 지배세력으로서 국내 매판 독점자본, 매판 관료집단, 매판 군부 바로 그들이다. 한국의 정치사는 바로 이 세 개의 매판집단의 역학관계의 변천사에 불과하며 10·26에서 5·17까지의 과정은 곧 그러한 역학관계의 또 한 번의 재편성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민중에 대해서는 항상 단일한 한 개의 적임을 명심하여야 하며 그들 내부의 갈등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70년대를 점철한 한국 민중의 투쟁에 절박한 위기를 느낀 결과 10·26이라는 예방조치를 취하여 한국의 지배체제를 재편성, 새로운 파쇼정권을 밀고 있는 미국이 언제까지나 영원한 우방일 수 있을까? 그들도 한국 민중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지 않고서는 우리 투쟁의 화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재편된 적은 기득권 방어를 위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가?

역사상 민중의 혁명적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등장하는 반동정권은 항상 중요한 내적 모순을 안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존의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기본적 생산관계를 보존·강화해야 한다는 측면과 상승된 민중의 요구를 표피적·부분적이나마 수용해야 한다는 두 측면의 모순 대립이다. 이는 반동정권의 가장 커다란 약점이며 우리 투쟁의 가장 중요한 이점을 형성하게 된다. 먼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적들은 경제개발계획 이후 형성되어온 재생산 구조를 온존한 채, 자본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켜 가고 있다. 최근 진행 중인 중화학공업 재편성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들은 70년대의 비교적 독립성을 가진 십여 개의 독점자본의 총체로서 성격지어진 한국의 자본을 하나로 통합한 국가자본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는 개별 독점자본 간의 과당경쟁을 막고 대외 경쟁력을 향상시키며 해외자본과의 복잡한 지배·종속관계를 커다란 덩어리로 재편시킴으로써 당면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포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화는 적들이 내부모순을 극대화시키면서 도달하는 최후의 형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적들의 긴박한 경제전략과 표리를 이루며 나타나는 파멸적 자기모순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의 국가자본에로의 집중은 중소자본가층의 현저한 분해를 야기하며 노동의 집중적 수탈을 감행하게 한다. 이는 사회구조의 첨예하고 대립적인 이원화 현상을 유발하여 적들은 점차 고립화되고, 오히려 자신들의 물적 기반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자기 파멸의 길이 되는 것이며 민중승리의 혁명적 비전이 되는 것이다. 정치는 경제의 집약적 표현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정치적 외피는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국가독점자본을 물적 기반으로 하고 물적 기반을 박탈당한 중산계층의 불안의식을 이데올로기로 하는 고도의 폭력적 정치형태이다. 그것은 폭력과 기만을 그 통치기술의 근간으로 하는바 군부가 현 지배세력의 정점에 서서 총칼로 만능을 삼는 것이 그 첫 번째 증거이며, 언론을 통폐합함으로써 대중조작을 통한 우민화를 수행하기 위한 선전 및 조작도구를 완전 장악한 것이 현 지배세력의 파쇼적 성격의 두 번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기본적 생존권과 정치·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뜨거운 열망을 부정하여서는 최소한의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 적들의 현실인 것이다. 소위 ‘민주, 정의, 복지’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갖는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중의 피어린 욕구의 집약적 표현임에 틀림없으며 적들도 그 내용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민주적일 수 없고, 정의로울 수 없으며, 민중복지와는 무관한, 더구나 민족적일 수는 더욱 없는 매판적 파쇼군사정권이 어떻게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셋째, 우리는 5월 투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궁극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수탈체제에 의해 기본적 생존권조차 부정당하는 노동자 농민 등 근로대중과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지식인세력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외세와 국내 매판지배세력을 이 땅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일체의 분단의 조건들을 분쇄하여 궁극적으로 민족의, 민중의 통일을 성취하는 위대한 민중투쟁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부여된 어렵고 긴 투쟁의 과정이다. 79년 후반에서 80년 초까지의 그 격동의 시기 역시 이러한 커다란 과제의 수행이라는 맥락에서 조명해보아야 한다. 1980년의 시작은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보다 견고한 지배체제의 구축을 의미했고, 유신 체제하에서 소외당했던 정치세력에게는 정권의 장악을 의미했으며, 우리에게는 민중의 투쟁을 보장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와 헌법기관의 구축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는 투쟁의 구체적 전개과정 속에서 그러한 기본목표를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첫째, 우리는 적의 본질과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둘째,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하여 민중들과 결정적으로 유리되고 말았다. 셋째, 학생대중은 전체 역량조차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학생운동이 70년대 이래로 지녀온 이념과 투쟁역량의 한계 그 자체였다. 70년대의 운동 전체가 갖는 비민중적 무책임성의 요소가 바로 광주항쟁의 실패라는 교훈으로 나타났으며 5·17 쿠데타의 성공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광주항쟁은 투쟁 내용의 급격한 진전을 수용하고 주도해나갈 담당세력, 즉 조직된 민중역량 없이는 현재의 적을 섬멸할 수 없다는 70년대 운동 전체에 던지는 우리 민중의 피의 선언인 것이다.


넷째,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5·17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이미 적들은 우리 민중의 명백한 피의 원수로서 집중적 타도의 대상으로서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투쟁은 광범한 민중연합이 매판파쇼지배세력을 어떻게 섬멸하느냐의 본격적인 반파쇼투쟁이다. 그 반파쇼투쟁의 주체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근간이 될 근로대중이어야 한다. 조직된 근로대중의 지도력에 의해 주도될 때 비로소 반파쇼투쟁은 확실한 전망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근로대중에게 그러한 지도력이 부재하다는 데 있으며, 더 큰 문제는 적들이 이미 국가를 폭력기구화함으로서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춰나가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의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사회보호법 등은 그들의 준비작업의 일단편에 불과한 것이다. 아직 우리 근로대중의 조직화·세력화가 명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과연 역사적으로 부여된 당면투쟁을 주도해나갈 것인가? 이를 수행할 추진력은 현재 유일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학생운동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학생운동은 산발적 투쟁의 한 요소가 아니라 전체투쟁을 진행시키는 주도체로서 자기변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역사적 요구는 학생운동의 양적 확대와 질적 심화를 당위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1. 근로대중에 대한 정확한 연구(?)와 그들과 더불어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실천적 전투력의 강화이다. 이에는 한국사회의 경제적 모순구조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구체적 검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2. 학생운동 역량의 양적 확대와 질적 심화가 어디서든지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투쟁역량을 통일적으로 적에 대한 투쟁을 향해 전개해야 한다.

3. 간단없는 투쟁의 전개이다. 투쟁역량의 승화로부터 지속적이고 철저한 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학생대중은 항상 투쟁의 자세를 가다듬고 상황의 전개에 임해야 한다.

4. 시위만능의 투쟁관은 타기되어야 한다. 시위는 그것을 포함한 모든 전술적 요소와의 전체적 고려하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비로소 학생운동은 적들에 대한 탄력적인 전체적인 응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한 모든 전술적 요소의 개발은 집중적 과제이다.

5. 학생세력의 민중운동에의 수렴과정이 보다 집단화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반파쇼 민중연합이 이념적·조직적으로 성숙될 것이다.


5·17 이후 극렬한 탄압 속에서도 계속 투쟁을 전개해온 경희대, 한신대, 고대, 동대, 국민대, 성대, 연대, 숙대의 학우들에게 늦게나마 뜨거운 격려의 뜻을 보냈다. 아울러 해외에서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많은 애국동포와 그 밖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도 감사하며 계속적인 성원을 부탁한다. 그러나 우리 운동의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적의 숨통을 조여가는가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운동은 어떠한 내적 준비를 해나가야 하는가이다. 그것은 당면한 투쟁의 외면이 아니다. 바로 당면한 투쟁의 시작이며, 투쟁의 심화과정인 것이다. 우리 민중의 위대한 승리를 위하여 민주학우여! 반파쇼투쟁에 모두 참여하자(199-208쪽)!


미주

[1]하어영(2025), 「국민 절반 이상 “통일 불필요”…“통일 필요” 첫 역전」,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224410.html;(2025.10.24).


참고 문헌

김명인(2024), 『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 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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