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현, 『편지 한 통-미제국주의 전상서』를 읽고
죽일 놈은 가차 없이 죽이고
살릴 놈도 가차 없이 살려라
-<편지 한 통>, 일본 천황이 치안유지법에게, 미제국주의가 국가보안법에게. 17쪽, 25쪽-
"저 같은 사람이라니요? 아니 일본 천황한테서 직접 상을 받은 미스터 허허 같은 분이 어디 그리 흔합니까? 미스터 허허 같은 분이야말로 앞으로 이 나라의 기둥감입니다. 일본 시대 허허 씨가 훌륭한 일 많이 한 것처럼, 우리 미국 시대엔 더욱 훌륭한 일 많이많이 해야 합니다."
-<신사고>, 101쪽-
민중을 위해서 투쟁한 별다른 경험이나 경륜이 없어도 어떻게 '반공'과 '친미'만을 열심히 부르짖다 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란 것도 알고요, 오로지 정치자금을 제공한 몇몇 분들의 이익과 번영만을 위해서 입법이며 행정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분지>, 141~142쪽-
하여간 기가 막힌 소설이다. 어쩌면 이 책에 실린 소설 세 편, <분지>, <신사고>, <편지 한 통>이 '현실풍자소설'의 가치를 절감하게 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표현. 그래, 젠장. 그 신랄한 표현이 너무 좋다. 한 문장 한 문장으로 현실을 더없이 냉철하게 까보이는 그 표현이 너무 좋다. 절대 세련된 문체가 아닌데, 어쩌면 촌스럽다고 할 법한 문체인데 읽을 때마다 가슴에 비수가 푹푹 박히는 기분이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이런 소설은 일찍이 본 적 없다.
<편지 한 통>은 국가보안법이 "누가 뭐라든 나의 구세주이시며 동시에 나의 영원한 어버이이신" 미제국주의에게 쓰는 편지다. 국가보안법은 편지 서두에서 자신이 전생에 대일본제국의 치안유지법으로서 천황의 특명을 받고 조선과 일본을 노도처럼 휩쓸다가 원자탄을 맞고 한 줌 재로 변했던 내력부터 시작해 '미제국주의의 괴력으로 대한민국에 전생'하여 "죽일 놈은 가차 없이 죽이고, 살릴 놈도 가차 없이 살렸던" 업적까지 줄줄이 늘어놓으며 '나와 당신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하고 강변한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이 장황한 편지를 다 끝맺기도 전에 이를 엿보던(감시하던) 미제국주의가 튀어나오며 둘은 한바탕 말다툼을 시작한다.
<신사고>의 '신(新)'은 '새 신'이다. 즉 '새로운 생각'을 말한다. 화자의 아버지 '허허 선생'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로서 일제 시절 일경의 첩자 노릇을 하며 '후떼이 센징' 수백 명을 잡아 넣은 공으로 천황에게 기꾸노고몬쇼오(국화꽃 문장. 일본 황실의 상징)가 아로새겨진 일본도를 하사받았다. 이후 팔일오 해방을 맞아 노도처럼 달려오는 몽둥이들을 피해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던 허허 선생은 우연히 미군 장교를 마주치고, 그로부터 "당신 참 훌륭한 분." 이라는 칭찬과 함께 권총을 건네받는다. 미군 장교는 "지금 이 나라엔 당신처럼 훌륭한 분이 많이많이 필요합니다."라며 앞으로도 이 나라의 '후떼이 센징'을 싸그리 잡아들여 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서 "우리 미군정은 친일파 죽이라고 안 했습니다"라고 덧붙이는 장면이 압권. 이후 허허 선생은 한 손에는 빛나는 권총을, 다른 한 손에는 영롱한 일본도를 들고 한반도 남반부를 이 잡듯 훑으면서 공을 세운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발작하는 허허 선생이 어느 날부터 태도를 싹 바꾸는데….
마지막으로 <분지>는 매우 유명한 소설이다. 1965년 발표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 사건'을 일으켰다는 문제의 소설. 이 소설로 남정현 작가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고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분지>는 미군 부사관의 첩 노릇을 하며 심한 고초를 겪는 여동생을 둔 화자 '홍만수'가 억하심정으로 그 부사관의 부인에게 강간 비슷한 짓(?)을 했다가 "핵무기의 집중공격으로 불꽃처럼 팡 하고 터져야 할 몸"이 되어 미군 병사에게 강간당한 충격으로 죽은 어머니에게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내용이다. 강간을 주요 소재로 삼은 <분지>는 여성 신체를 수탈 또는 정복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여성학자들에 의해 자주 비판받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를 감안하여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설을 썼을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더 좋겠다.
솔직히 책을 덮고 나서 별로 할 말이 없다. 다만 남은 건 기분뿐이다. 비수로 사정없이 찔린 기분. 그러나 참 시원하다는 기분. 그 이상야릇한 기분. 남정현이 쓴 이 소설 세 편은 "이런 세상이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마저 없는 바로 이런 세상(141쪽)"에서 날아오는 몽둥이로 얻어맞아가며 그 빌어먹을 세상을 까발리기 위해 꾹꾹 눌러쓴 소설이다.
왜 머뭇거리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책을 펼쳐 보라. '도서출판 말'에서 낸 『편지 한 통-미제국주의 전상서』다. 혹시 책을 읽고, 남정현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면 그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남정현의 삶과 문학』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