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 외 2인, 『하노이의 길』을 읽고
모두 2018~2019년 남북관계에 불었던 훈풍을 기억하리라.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이전까지 냉담하기 그지없었던 남북관계가 변하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뭔가 변화가 이는구나!"하는 희망을 가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여러 차례 만나는 모습, 또 무슨 군사합의며 종전선언을 하는 모습을 보며 통일까진 무리더라도 남북교류가 활성화될 가능성을 점쳤더랬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고 북한 정부는 뜬금없이 남한 정부에 분노를 표하며 남측에서 큰돈을 들여 지은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뒤 관계를 단절했다. 남북관계는 예전으로 되돌아갔고, 낡아빠진 반공 냉전 논리를 내세우는 윤석열의 등장으로 서로 악담을 퍼붓고 무인기와 오물풍선이나 날리는 신세가 됐다. 마치 한바탕 달콤한 꿈을 꾸다가 현실로 내팽개쳐진 것처럼. 이게 다 무슨 일이었을까?
남한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대북정책이 유화적으로 바뀐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도 정권교체가 일어난 적 없는 북한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제재의 어려움'에서 찾는다. 북한은 아주 오랫동안 UN과 미국의 제재를 받아 왔고, 지금껏 체제를 유지하고 핵무기까지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만 제재는 단 한 번도 고통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핵 보유 이후 더 심해졌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를 참고 살 수도 있지만, 기회가 되면 빼내려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그 가시가 점점 파고들어 온다면 말이다. 북한은 남한이 내민 손을 잡음으로써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여 여러 경제 이익을 취하고 나아가 제재 해제까지 이루어냄으로써 정권의 치적으로 삼을 생각이었으리라.
문재인 정부가 남북교류에 진심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북한이 진심이었느냐고 묻느냐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언제나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남한과 대화에 임했으나 그때마다 항상 극도로 긴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경제 지원을 받을 목적으로 남북교류에 임하면서도 '햇볕이 대포보다 더 위험하다'라며 남한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한에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을 경계했다. 체제 유지를 위해 개혁개방조차 포기한 국가가 북한 아니겠는가.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북 정부가 합작하여 여러 교류의 장(남북 고위 인사의 평양과 서울 방문, 평창올림픽 공동훈련, 공동참여 등)을 마련했으나 이는 겉치레일 뿐 진정한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측 인사들, 특히 고위 관료가 아닌 북측 인사들은 남측 인사들과 대화 한마디 자유롭게 못했을뿐더러 남한에서 보고 들은 바를 말했다고 처벌까지 받았다. 북한 응원단원 얘기다. 이는 북한 정부가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남북교류' 자체를 수용하지 않고 이를 오직 경제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함을 보여준다. 그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변화는 곧 체제를 무너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체제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 가장 좋다. 물론 우리 정부도 이런 사실을 알았으리라. 그렇지만 동상이몽 속에서라도 남북교류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북한이 '체제 위협이 되지 않는 한에서 경제 이익을 얻기 위한 남북교류'만을 추진한다 하더라도 냉전상태보다는 형식적인 교류라도 이뤄지는 상태가 백 배, 천 배 낫고 또 교류가 오래되면 한반도에 예기치 못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상이몽 속에서 남북교류가 추진되었다. 이윽고 싱가포르 회담이 열렸고, 다음으로 하노이 회담이 열렸다.
결렬된 이유는 단순하다. 북한이 애초에 '비핵화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비핵화 협상에 임했기 때문이다. 북한 정부는 남북교류를 시작한 이래 몇 차례나 "김정은 위원장은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그런 말을 들었다고 언론에 밝힌 뒤 이런 발표가 몇 번이나 반복됐고 결국 미국과 비핵화 협상까지 이뤄졌다. 북한에게도, 한국에게도, 미국에게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실상 북한은 비핵화 의지가 없었다. 북한에게 핵은 갖은 어려움 속에서 만든 정권의 심장이다. 핵이 없으면 북한은 아무것도 아니다.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 왜 비핵화하겠다고 말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거짓말이다. 저자가 추측한 북한의 기본전략은 이렇다. 우선 비핵화하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고 실제 이런저런 연극을 벌이면서 어느 정도 비핵화 요구를 수용한다. 그 대가로 제재 해제와 각종 경제지원을 받아내면서 시간을 최대한 끌다가 최종단계에 이르면 합의를 깨고 비핵화를 포기한다. 이렇게 하면 UN이든 미국이든 오랜 기간 평화 분위기를 조성한 상태에서 곧장 다시 제재를 가하기가 어렵고, 그 김에 얼렁뚱땅 핵보유국으로 인정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이었으리라. 설사 제재를 다시 가하더라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계산이었겠다. 물론 미국 정부는 바보가 아니고, 그래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복구 불가능한 비핵화(CVID)'를 요구했다. 물론 북한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비핵화는 '불완전하고 검증할 수 없으며 복구 가능한' 비핵화였다. 이렇게 양측 의견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회담이 성사되었는가? 북한 측은 황당하게도 트럼프라는 인물의 허영심에 기대를 건 듯하다. 트럼프가 북한 비핵화에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유래없는 관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평소 소위 '관종' 짓을 하니까 그 빈틈을 파고들어 이득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었다고 추측한다. 실제로 북한 실무진은 정상회담 전 실무자 협상 과정을 완강히 거부했고, 오직 "정상 대 정상" 문제 해결법을 고집했다고 한다. 북한 정부는 트럼프라는 인물이 북한 비핵화라는 '세계적인 업적'에 욕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자신들이 이런 명성을 얻을 기회(영변 핵시설 폐기)를 제공한다면 설사 그게 미국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덥썩 물 것이라는 데 판돈을 걸었다. 그리고 그 기대, 어찌 보면 황당한 망상은 배신당했다. 트럼프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회담 결렬 이후 김정은 위원장은 속이 말이 아니었으리라. '최고지도자'가 먼 길을 와서 회담에 임했는데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자국 언론은 물론 세계만방에 '역사적인 협상'이라고 큰소리를 뻥뻥 쳐댔는데 결과는 'No Deal'이다. 화가 났으리라.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통역사에게 막판에 가서 제대로 통역을 못했다고 화를 냈다는 소문이 있다) 분노를 쏟아냈겠고, 다음 표적으로 남한이 얻어걸렸다. 왜 남한인가? 저자는 여러 정황을 모아 청와대에서 협상 전략과 관련된 조언을 건넸다고 추측한다. 정확한 대화 내용은 불명이지만 남한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성'에 판돈을 걸라는 조언을 했으리라고. 그리고 이제 협상은 결렬되었다. 상식적으로 이대로 다 끝낼 심산이었다면 '철천지원수' 미국에게 비방을 날려야 정상이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에게는 대단히 유화적인 전언을 내고 대신 남한에 맹폭을 가했다. 직전의 사탕발린 말은 가식에 불과했다는 듯 온갖 비방을 퍼붓더니 급기야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시키며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중매 잘못 서면 뺨이 석 대"라는 속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남한 정부로서는 대단히 억울했으리라. 우선 가짜 비핵화 의지를 남발하며 협상에 임했던 건 북한이고, 삼자협상을 하자는 남한 정부를 따돌리고 미국하고만 대화했던 것도 북한이다. 남한 정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북교류를 촉진하고 비핵화 협상을 돕는 데 매진했을 뿐이다. 그런데 회담이 뜻대로 안 됐다고 이런 처사라니.
협상이 한 번 결렬됐다고 해도 재협상 여지는 남아 있다. 또 비핵화 협상이 잘 안 되어도 남북교류는 그와 다른 일이다. 그런데 미국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은 모든 문을 닫아걸고 관계를 무위로 돌려버렸다. 왜 그랬을까?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최고지도자가 무능해서. 김정은이 자신의 실패를 '남 탓'으로 전가하고 냅다 포기하는 무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어쩌면 남한을 지나치게 의식했기에 더 분노가 컸을 수도 있다. 지금껏 모든 면에서 선전해 온 '잘사는 형제국가' 남한을 제치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대통령과 단독 협상함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세계만방에 높일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날렸고, 그 김에 남한이 더 꼴 보기 싫어져 문을 닫아걸었다는 말이다. 둘째…. 사실 이것 말고 다른 추측이 생각나지 않는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협상에 실패했으니 위신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자국에서는 허위선전에 가까운 조작보도로 이미지를 관리할 수 있다. 실제로 북측 언론들은 하노이 회담 결렬을 최대한 감추는 보도를 냈다. 즉 체제에 중대한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는 뜻이다. 미국에게 가짜 비핵화가 먹히지 않은 건 안타깝지만 남한을 상대로 비핵화 팔이를 계속하면서 남북교류를 확대하면 될 일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본래 목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달성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북한은 그러지 않았다. 이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책도 여기에 답해 주지는 않는다. 이 문제에 높은 식견을 가진 분이 글을 읽으셨다면, 댓글로 의견을 달아 주시면 좋겠다.
이후 남북관계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온갖 악담을 퍼붓는 사이로 전락했고 심지어 남측에서는 대통령 친위 쿠데타 명분을 확보할 목적으로 평양에 드론을 날렸다. 북한도 이에 대응해 강도 높은 성명을 내고 오물풍선을 날려 댔다. 만약 북한이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면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국방장관의 계획대로 남북 국지전이 발발해 비상계엄의 명분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최근 내란 특검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휴대전화에서 “(북한의) 체면이 손상되어 반드시 대응할 수밖에 없는 타겟팅” “평양, 핵시설 2개소, 삼지연 등 우상화 본거지, 김정은 휴양소” “최종 상태는 저강도 드론 분쟁의 일상화” “불안정한 상황에서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찾아 공략해야 한다” 등의 메모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1]. 그러나 북한이 예상만큼 반응하지 않았기에 결국 친위 쿠데타 명분 조성에 실패했고, 이후 대통령이 탄핵되며 진실이 드러났다. 새로 들어선 이재명 정부는 남북대화에 열려 있음을 공표했지만 북한은 전혀 마음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분단 이후 남북관계는 언제나 '나쁨'과 '매우 나쁨'을 오갔으니까. 종종 남북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이란 명제 자체가 실현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이는 북한 지도부의 이해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권 핵심에 자리잡은 소수 인물만이 북한을 이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남북관계에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억눌려 있다. 남북교류 거부가 북한 인민 전체의 의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힘을 키우고 마음을 단련해야 한다. 북측 권력자들이 남한을 무력으로 협박하는 일이 별 이득이 없으니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몇 번이고 거절당해도 손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평행선을 달리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또 기회가 온다.
[1]강재구(2025), 「특검 “충격과 공포”…지난해 10월 평양 무인기 ‘계엄 명분용’ 결론」,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28490.html(2025.11.18).
라종일, 김동수, 이영종(2022), 『하노이의 길』, 파람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