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으로서의 인간과 교육(2)

교육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by 생각하는 쥐

(1)“이와는 반대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오히려 예외라는 생각은 완전히 어리석은 접근 방식이며, 심지어 사악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엘리트 체제를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한 민주주의 시스템은 평범에만 주목한다. 반면에 솔직하고 용감무쌍한 엘리트들, 즉 현대의 ‘왕자’들은 거침없이 진실을 말하고, 그에 따라 움직인다.”(톰 플레이트, <리콴유와의 대화>(2013, 알에이치코리아, 158쪽))


(2)“싱가포르에서도 부자 부모 만날수록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갈 확률이 높은 건 당연하지.”


(3)“교육정책이잖아. 학생이나 부모가 가난하다면 그 부분은 복지 정책에서 다루면 되는 것이고, 만약 학생의 가정이 보조금이 필요하다면 그 부분은 재정 정책에서 다루면 도는 거지. 교육은 학생의 학습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선적으로 신경 써야 되는 거 아니야? 교육은 정치가 아니잖아.”(김선, <교육의 차이>(2018, 혜화동, 152쪽))


(4)“싱가포르에서 이러한 선별적 교육제도가 만들어지고 본격적으로 실행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야. 그때만 해도 싱가포르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웠지. 그래서 학생들이 공부보다는 집안 생계를 도와야 했기 때문에 학교 중퇴율이 아주 높았어. 가난한 싱가포르 정부는 얼마 되지 않는 재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방법을 곰니했어. 그래서 어차피 여러 사정 때문에 학교를 다니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학생들을 정부가 제도적인 장치들을 통해 사전에 걸러 냄으로써 전략적으로 부족한 자원을 필요한 인재들을 키우는 데 투자하기로 한 거야. 그래야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 생각했고, 이런 논리로 만들어진 제도가 선별적 교육 제도인 거지.”


저번 글에 이어 두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기회의 평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마다 투자 대비 수익률에 차이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나는 사실 여기에도 의문이 들지만 일단은 넘어가겠다. 다음에 다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완전히 같은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능력의 측정도 훨씬 용이할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미국과 싱가포르의 교육관료들은 이것을 ‘기회의 평등’이라 부른다고도 이야기했다. 자, 그럼 인용문을 보자. 두 인용문 중 (1)은 싱가포르의 독재자 리콴유의 발언이고 (2),(3),(4)는 싱가포르 교육부에서 솎아 내기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내뱉은 발언이다. 리콴유는 우생론자로 인간은 유전자 단위에서부터 우열분자로 갈린다고 믿었던 인간이다. 그는 오랜 기간 싱가포르에서 철권통치를 펼치며 우생론과 능력주의가 결합된 자신의 사상을 교육제도로 구현했다. 이런 배경 아래 기회의 평등을 중시하며 엘리트 육성에 초점을 맞춘 교육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싱가포르 교육제도는 ‘기회의 평등’을 구현하고 있을까? 당장 교육부 공무원의 인터뷰만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4)를 보면 초기 싱가포르 교육제도는 기회의 평등을 주지 않았다. 오직 학업을 지속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가정배경을 가진 학생들만이 학교에 남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그들이 엘리트로 선발되었다. 이에 저자가 “왜 부자 나라가 된 지금도 이런 제도를 고집하냐”라고 묻자 엉뚱하게도 “싱가포르는 천연자원도 없는 작은 도시국가지만 선별적 엘리트 교육제도가 있어서 훌륭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라고 대답한다. 일단 여기서 싱가포르는 처음부터 기회의 평등이 있던 게 아니라 부유한 학생들만 투자를 받아 엘리트로 선발되는 구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뷰 내내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다고 하던데 그럼 가난하던 시절을 벗어난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2)를 보면 해당 공무원도 부모의 재력에 따라 엘리트로 선발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에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자 인터뷰어는 뜬금없는 얘길 하나 하는데, 그게 바로 (3)인용문이다. “학생의 재정 문제는 복지나 경제 정책에서 다뤄야 하는 문제고 교육은 정치가 아니다.” 저자는 이 말을 듣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런 충격을 받았다. 다만 저자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말이다. 교육이 정치가 아니라고? 교육으로 엘리트를 선발해 ‘차세대 지도자’라고 부르고 임용과정도 없이 고위 공직에 임명하는 등 온갖 특혜를 주는 나라에서 교육이 정치가 아니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교육은 정치다. 루홀라 호메이니의 말을 빌려 바꿔 보자면 “교육은 정치적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교육은 무엇보다 강력한 계층 분리 수단이기 때문이다. 제도적 차원에서 국민을 엘리트와 비엘리트로 나누며 엘리트가 권력을 움켜쥔 사회에서 교육이 정치가 아니라니. 앞뒤가 안 맞는 헛소리만 늘어놓는 인터뷰어에게 심각한 문제를 느꼈다.


그럼 여기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기회의 평등’과 능력주의를 강조하는 미국과 싱가포르의 교육관료들은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학생들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풍부한 장학금을 지급한다. 이것이야말로 기회의 평등 아닌가?” 전부 Bullshit(개소리)이다. 자칭 기회의 평등을 제공한다는 미국과 싱가포르의 교육제도에서 기회의 평등이라곤 장학금 하나뿐이었다. 같은 시험을 보게 하고, 장학금을 준다. 이게 전부다. 그 외의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이게 기회의 평등인가? 장학금은 오직 생계, 혹은 학비 문제만 해결해 줄 뿐이다. 그리고 장학금은 결코 순수한 호의가 아니다. 미국 대학들이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 엄청난 장학금을 뿌리면서도 높은 학비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돈으로 학비를 낮추면 되지 않는가? 이것이 행정력 소모를 훨씬 줄이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애매하게 어려운 학생들의 문제까지 일괄적으로 해결해 주는데도?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학생들에 대한 통제 때문이다. 세상에 조건 없는 돈은 없다. 장학금은 무조건 조건이 붙는다. 장학금을 주면서 학생들을 통제하고 졸업 후 진로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설사 조건이 없는 것 같아 보여도 학생들은 어떠한 무형의 영향력을 내줄 수밖에 없다. 그런 장학금의 대표격이 싱가포르의 대통령장학금으로, 장학금을 받은 기간만큼 정부에서 일해야 한다. 엘리트들을 친정부 성향으로 만드는 방편이다. 또 추가적인 문제는, 출발선만 동일하게 긋지 이후에 중간 결과에 따라 계속 차별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빠르진 않다. 초반에 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대기만성형인 사람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시험 성적만으로 초반에 치고 나가는 사람만 ‘엘리트’로 선발해 집중 육성하면 대기만성형 인간은 바로 능력 없는 비엘리트로 치부된다. 실패나 좌절 등을 통한 성장이 없는 것이다. 사실상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는 교육’이다. 이와 반대로 핀란드에서는 학생이 느려도 바로 도태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더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준다. 이렇게 여러 번 기회를 주면서 단 한 번의 실패로 영원히 사회의 밑바닥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여기서 싱가포르의 교육은 선별의 도구이고, 핀란드의 교육은 평생의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어떻게 현행 교육 제도로 인간의 우열을 가르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종이에 쓰인 글자를 달달 외우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기준으로 인간의 우열을 가르는 건 말이 안 된다. 인간은 자연선택 속에서 진화한 생물이지 엑셀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번째 질문, ‘기회의 평등’이 있다는데 ‘결과의 평등’은 없는 이유는 애초에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우열을 가를 수 있다는 평가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모든 기회를 완벽히 똑같이 제공한다고 해도, 정말 그것이 결과의 모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가? 이것은 또다른 질문일 것이다.



세 번째 질문은, 우리가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현대 교육에 적합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는데 뭔가 달달 외우거나 수학 문제를 푸는 능력을 가르치고 시험을 보는 것으로 인간의 우열을 가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멀티 플레이어(Multi Player)다. 인류 진화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교육이라는 것은 나이 많은 개체가 나이가 어린 개체에게 자신의 경험을 비체계적이고 직접 해 보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대 교육을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얼마나 잘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나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므로 이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기는 힘들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더 깊이 탐구해 보겠다.


이렇게 <교육의 차이>를 읽고 생긴 세 가지 질문을 통해 교육에 대해 탐구해 보았다. 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나라의 교육이 인간을 자본으로 만들고 그에 부가가치를 부여하는 잘못된 교육이라고 믿는다. 이런 교육은 영국, 싱가포르, 미국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반면 인간의 인격 성장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교육은 독일과 핀란드의 것이다. 이쪽 교육에 훨씬 더 마음이 끌렸다. 앞으로도 교육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교육은 어떤 형태여야 할 것인지 고민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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