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차 변리사가 현장에서 목격한, 바이오 스타트업의 뼈아픈 특허 실수
"우리 기술은 완벽합니다. 어서 특허를 내서 경쟁사들을 막아주세요."
수년간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해 온 바이오 스타트업 대표님들의 눈빛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15년 차 변리사로서 그 뜨거운 열정과 실험실의 땀방울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슴이 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그 혁신적인 기술이, 특허의 문법을 몰라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현장을 너무나 자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특허는 발명가의 연구 일지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내 기술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입니다."
훌륭한 기술력이 곧 강력한 특허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차가운 현실 속에서 우리 기업의 기술을 지켜내기 위해, 발명가들이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치명적인 패착들을 짚어보려 합니다.
"대표님, A, B, C 성분을 이 비율로 섞었을 때만 효과가 있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가 찾은 1:2:3이 황금 비율입니다. 이걸 특허로 내주세요!"
발명가에게 '정확한 수치'와 '구체적인 실시예'는 혁신의 증거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특허의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청구항에 "A, B, C 성분을 1:2:3 비율로 포함"이라고 못 박는 순간, 경쟁사는 '1:2:3.1'로 조금만 비율을 비틀어 쉽게 특허망을 빠져나갑니다. 이것이 제가 기술가치평가에서 가장 자주 마주하는 '좁은 특허'의 뼈아픈 사례입니다.
진짜 가치 있는 특허는 구체적인 실시예에 갇히지 않습니다. 기술의 본질을 꿰뚫어 '화학식의 상위 개념'으로 넓은 권리의 울타리를 쳐야만, 경쟁사의 교묘한 회피 설계를 원천 차단할 수 있습니다. 기술을 사랑하는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시장을 넓게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변리사님! 이번에 저희 기술이 세계적인 네이처 자매지에 실렸습니다!"
연구자로서 평생의 숙원을 이룬 대표님의 기쁜 목소리를 들을 때면, 제 등골은 서늘해집니다. 학계의 시계는 '공개와 공유'를 향해 흐르지만, 특허의 시계는 '비밀 유지와 독점'을 향해 흐르기 때문입니다.
특허는 무조건 '기술 공개 전 출원'이 철칙입니다. 훌륭한 연구 성과를 학회나 논문으로 먼저 발표해 버려 신규성을 상실하면, 눈물을 머금고 사업화의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불가피하게 공개되었다면 공개일로부터 12개월 이내에 반드시 출원을 마쳐야만 권리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저희 화합물이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데이터가 이렇게나 많습니다. 당연히 특허가 나오겠죠?"
자체 데이터만 잔뜩 들고 와서 특허 등록과 성공적인 시리즈 A 투자 유치를 기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특허청 심사관과 벤처캐피탈(VC)이 묻는 질문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이 기술이 기존 선행기술보다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더 뛰어나다는 건가요?"
진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비교 실험 데이터'가 필수적입니다. 가장 유사한 기존 기술과의 직접적인 비교를 통해, 우리 기술의 우수성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입증해야만 합니다. 무작정 방대한 실험으로 시간과 자본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경험 많은 변리사와 함께 핵심만 찌르는 최소한의 전략적 데이터 설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에필로그: 발명가의 언어를 시장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
15년간 바이오·제약 특허 현장에 있으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변리사의 역할은 단순히 서류를 대신 써주는 대서소가 아닙니다. 실험실의 언어(연구 결과)를 자본주의 시장의 언어(독점적 권리와 기업 가치)로 번역하는 '통역사'이자 '전략가'입니다.
훌륭한 기술이 제대로 된 무기로 벼려지지 못하고 종잇조각으로 사라지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브런치를 통해, 단순한 법률 이론이 아닌 진짜 현장의 땀방울과 비즈니스의 사활이 걸린 IP 생존 전략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 보겠습니다.
실험실의 혁신이 어떻게 세상의 권리로 탄생하는지, 그 치열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기대해 주세요.
석종헌 변리사
15년 차 바이오·의약·화학 전문 변리사. 녹십자, 서울대학교병원 등 국내 주요 연구기관과 혁신 스타트업의 특허 전략을 전담해 왔습니다. 발명가의 치열한 땀방울이 자본주의 시장에서도 온전한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돕는 '통역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기술이 잘못된 특허의 문법 탓에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현장의 생생한 IP 생존 전략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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