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칭 2주 전이었다. 내 스케줄은 이미 한 치의 여유도 없었다. 외근이 줄줄이 잡혀 있고, 론칭하면 밀려올 물량 때문에 하루하루가 시뮬레이션처럼 빡빡했다. 게다가 장염으로 며칠째 속이 뒤틀린 채 출근 중이었다.
그날 오후, 대표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하나만 좀 도와줄래?"
나는 반사적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아직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 오면 돼. ㅇㅇㅇ 2시 미팅이야.
쇼호스트님 택배받을 주소, 판넬 정보, PD 연락처만 받아오면 돼."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세 가지 일을 받아오라는 건 명백한 업무였다.
낯선 카테고리 론칭 미팅은 처음이라 준비도 안 된 상태였고, 방송일을 잘 아는 장하경 과장이 있음에도 대표가 나를 택한 건 아마 그와의 관계가 불편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 본업이 아닌 일인데, 내가 이걸 떠안는 게 맞나?
그런데도 이미 "네"라고 해버린 내 입이 미웠다.
왜 나는 항상 먼저 수락부터 하고, 나중에 가서 후회할까?
이런 상황, 나만 겪는 게 아니다.
A부장이 B팀과 사이가 껄끄럽다. 중요한 자료를 받아야 하는데, 자기 대신 친한 C대리에게 부탁한다. "그냥 가서 웃으면서 받아오면 돼"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묵직한 갈등의 공기가 흐른다. 결과적으로 C대리는 본업을 제쳐두고 중재자 역할까지 떠맡게 된다.
회의 30분 전, 상사가 "잠깐 이것만 해줘"라며 자료 수정 요청을 한다. "몇 줄만 고치면 돼"라고 하지만, 그 몇 줄이 엑셀 수식과 데이터 연결까지 건드려야 하는 큰 작업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상사는 그 무게를 축소해 표현하지만, 막상 맡는 사람에겐 퇴근 시간까지 지연되는 부담이 된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따르면, 권력거리가 높은 조직일수록 부하직원이 상사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고 한다. '순응 압력'과 '관계 유지 욕구'가 결합해, 업무 과부하를 감수하고라도 수락하게 만드는 심리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그랬구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후로 나만의 방법을 만들었다.
듣고 바로 답하지 않기. 요청 내용과 범위, 기한을 먼저 묻고 메모한다.
내 역할과 일정 비교하기. 본업과 일정에 지장이 있는지 점검한다.
조건부 수락 또는 부분 수락 제안하기. "세 가지 중 1가지만 할게요"처럼 범위를 줄인다.
대안 제시하기. 다른 적임자를 연결하거나, 자료 전달 방식을 제안한다.
그날, 나는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 말씀해주셨던 미팅은 제가 처음이라 준비 시간이 필요해요. 세 가지 중 판넬 정보만 제가 맡고, 나머지는 ㅇㅇㅇ 님께 부탁드리면 일정이 더 원활할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최대한 도움 주고 싶은 마음도 전달되었고, 상황상 어디까지 내가 도울 수 있는지도 명확히 소통할 수 있었다.
대표는 "알겠어, 도와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가장 좋은 건, 내가 부담 없이 기쁘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다음엔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가볍게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절은 관계를 끊는 게 아니었다. 나를 지키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건강한 소통의 시작이었다.
그 미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론칭도 무사히 끝났다. 무엇보다 ㅇㅇ 과의 관계도 더 좋아졌다. 서로 역할을 명확히 나누니까 오히려 효율적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