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초대

by 생크님

10년+ 째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겼다.

이번에는 내가 맡고 있는 품목의 업무가 아닌, 전혀 다른 영역의 일.


대표님의 자녀 중에 한 분이 새로 설립한 법인의 새로운 품목, 플랫폼의 첫 론칭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셋째가 혼자 서는 게 보기 그렇다. ㅇㅇ를 같이 보내자.”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내 일이 아닌데… 왜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하지만 속으로만 삼켰다.

며칠 뒤, 셋째가 직접 그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스쳤다. 입꼬리 한쪽이 올라가며 씰룩거리는 웃음. 고소한 건지, 든든한 건지, 머쓱한 건지 알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의 단면이었다.




자존심과 체면 사이


나는 그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날 업무가 비어 있으니,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그런데 얼마 뒤, 셋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안 와도 됩니다.”


나는 잠시 멈췄다. 그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필요하면 지원할게요.”

그러자 그는 약간 빈정 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는 그러지 마세요.”

그 말은 (오랫동안 알고지내왔던 우리사이에) ‘너무 딱딱하게, 업무적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뜻처럼 들렸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아버지가 혼자 가는 게 마음이 쓰이셨던 것 같아요.”




불편하게 다가온 질문


그 이후 내 마음에 자꾸만 이런 질문이 맴돌았다.

“내 일도 아니고, 내 회사 일도 아닌데, 왜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보상도 없고, 명목도 없는데”


10년+간 나는 회사에서 책임감있게 일해왔다.

내 영역에서 성과를 내고, 책임을 다하고, 조직을 위해 헌신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쌓아온 전문성과는 아무 관련 없는 자리.

“체면”이라는 이유만으로, “분위기”라는 이름으로, 내 시간을 당연하게 쓰려는 구조 앞에서 나는 불편해졌다.




내 안의 이 감정은 어디서 왔을까


뿌리를 곱씹어 보았다.

그건 단순히 ‘가기 싫다’는 게 아니었다.

1. 역할의 모호함

업무 담당자인 내가 왜 타 론칭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경계가 불분명하다.

2. 보상의 부재

불려 나가도 인센티브도 없고,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도 않는다. 그저 ‘있어주는 존재’로만 소비된다.

3. 응원 vs. 강요의 경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 방식과 범위는 내가 정하고 싶다. 그런데 마치 “가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얹혀지니 거부감이 올라온다.

즉, 내 안에서 올라온 감정은 자기존중감을 지키려는 본능적 반응이었다.





왜 이 장면이 그렇게 피곤했을까


이 상황은 조직심리학에서 자주 다루는 몇 가지 주제와 맞닿아 있다.

1. 역할 모호성(Role Ambiguity)

내가 맡아야 할 책임과 경계가 불분명할 때 생기는 긴장.

→ ㅇㅇ업무 담당자인 내가 왜 타 론칭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2. 역할 갈등(Role Conflict)

회사가 원하는 것, 상사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충돌할 때 오는 갈등.

→ 아버지는 체면을 원하고, 셋째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고, 나는 내 역할을 지키고 싶다.


3. 심리적 계약(Psychological Contract) 위반

고용관계에는 “서로 무엇을 해주고 받을지”에 대한 암묵적 약속(심리적 계약)이 있고, 이게 어기면 배신감·냉소·이직의도 등 부정적 반응이 커짐

→ 보상 없는 지원,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결국 냉소와 소진을 만든다.


4. 감정노동(Emotional Labor)

마음속 불편함을 억누르고 “괜찮은 척” 해야 하는 상황.

→ 응원은 하고 싶지만, 억지로 가야 한다는 강요는 결국 감정의 소진으로 이어진다.




직장에서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다.


명목도 없고, 보상도 없는 자리.

하지만 체면이나 분위기 때문에 끌려가야 하는 순간.

그럴 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1. 자기 질문 세 가지

이건 내 업무인가?

보상은 있는가?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가?

→ 세 가지 중 두 개 이상이 ‘아니오’라면 정중히 선을 긋는 게 맞다.


2. 응원과 경계의 균형

응원은 표현하되, 억지 동원은 거절한다.

“방송 꼭 챙겨보고 연락드릴게요.”

“현장에는 못 가지만,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3. 거절 훈련 문장 준비하기

갑작스러운 부탁이 들어왔을 때, 미리 준비된 문장이 필요하다.

“제가 직접 가기는 어렵지만, 마음으로 응원할게요.”

“제가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따로 축하 인사드리겠습니다.”


4. 죄책감 내려놓기

거절했다고 해서 내가 냉정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이미 응원했다. 다만 내 방식대로, 내 한도 안에서.



나는 누구의 체면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내 기준에서 응원할 수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들러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 주체적인 태도는, 나를 소모시키는 조직 안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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