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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김에 신으로 살기(16)

내 마음은 정상이 아님,

3-3. 영원한 마음도 절대의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말로 배우고 말로 교류하고, 말로 표현하며 사는 것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에는 미묘하고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단어의 나열로 형태화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음도 영원한 마음이 없고 모든 감정도 흘러가는 것인데 형태화된 말은 오래지 않아 빛이 바래고 지나가 버리곤 합니다. 다만 진실된 체험이 바탕이 된 말은 감동을 불러오고 삶을 바꾸는 기회가 되지만 우리의 일상은 강물처럼 말의 홍수로 가득합니다. 

 부정적인 말에 꽂히면 화가 나고 자괴감이 들고 불쾌하고 우울해집니다. 내 마음이 그 단어에 걸리는 것은 내 마음이 그 단어에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비난하는 어떤 말, 예를 들어 ’넌 정말 게을러. 비호감이야.‘ 하는 말을 들으면 그 단어를 그가 왜 사용했는지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왜 좋은 말이나 다른 단어를 쓰지 않고 꼭 그 단어로 상대를 공격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 스스로 그 단어와 그 단어 느낌으로 공격을 받았거나 마음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가 사용하는 단어는 바로 그의 마음 상태를 반증하는 것이며 세상을 보는 잣대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우리 자신이 그의 상태에 동조하고 감응하며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그의 오늘의 말은 내일은 변할 수 있는 가볍게 다루어도 될 에너지입니다. 이유 없는 부정적인 비난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듣고 들어도 듣지 않고, 나로 돌아가 호흡에 집중하며 평화롭게 존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특히 예민하게 열려 있어 남의 말에 영향을 잘 입는 사람은 순수한 나를 지키기 위해 상대의 습관적 태도를 이해하고 깨어있으면 상처를 덜 받습니다. 



3-4. 타인과 환경에 무심해 봅니다. 


 좋은 환경과 품성이 좋은 인간을 즐기며 행복감을 나눌수록 의식 또한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의식의 본래 모습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상황도 늘 함께 존재하기에 여기에서는 무심하는 훈련의 필요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 응축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수행이 되면, ‘보되 보지 않고, 듣되 듣지 않으며, 느끼지만 느끼지 않는다’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너무 외부에 열려 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안으로 모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쉽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원치 않는 상황일 때 그냥 내면의 어떤 곳으로 들어가는 훈련입니다. 


가슴에 집중한다거나 호흡에 그저 집중한다거나 복식 호흡을 하여 단전에 머물고 있다거나 등등 자신이 원하는 몸의 어떤 부위로 들어가 그저 존재하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존재계가 원치 않는 사건과 고통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태도를 훈련하기 위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래의 내면세계는 무심한 평화로움 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 앞에서 쓸모없는 일로 언쟁을 하고 있을 때 개입해서 뜯어 말릴 수도 있겠지만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정리하기도 합니다. 외부로 열린 인정받고 싶어하는 에고는 이 틈을 이용해 나를 드러내고 싶어하곤 합니다만 그 끝은 누가 보아도 뻔한 싸움이나 필요 없는 비난으로 끝날 상황이라면 고요하게 침묵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비겁하게 도망가라는 뜻이 아니라 그 소용돌이 속에서 무심하게 판단 없이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놀랍게도 5분 안에 그들은 나의 무심의 에너지가 평화의 에너지와 닮아있기 때문에 언쟁을 멈출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아주 많습니다. 갈등의 에너지나 억압과 폭력의 에너지가 분출될 때 사용하면 나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의식의 에너지는 마음의 에너지보다 강하고 선한 영향력을 갖기 때문입니다. 무심은 의식의 텅빔이 지닌 지혜입니다. 일상에서 무심하게 있는 훈련을 하면 감응력도 자라고 평화로워집니다.




3-5. 집중할 것과 무시할 것을 구별합니다.  


 여기서는 에너지 사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집중은 필요합니다. 당장 해야 할 과제와 업무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식이 성장하였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집중할 것에는 몸과 마음과 의식이 하나로 모아지고, 관심이 없는 것에는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지금 여기를 사는 태도이며 현존 그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필요가 없는 생각이나 마음으로 복잡해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이의 것이란 성경 구절에서 어린이는 지금 여기에 몰두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물론 순수하여 욕망과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은 인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명상적 태도로 의식이 자각되기 시작하면 집중의 에너지가 높아지고 창조력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 늘어진 반복적 사고의 습관이 필요한 것으로 응축하는 에너지 훈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시할 것이란 앞서 말한 무심과 호흡에 집중하는 등의 방식으로 부정적 잡념과 거리 두기하겠다는 의식적 결정이고, 무시한다는 것은 타인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 집중이 될 때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의 발생과 소멸의 원인과 시기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오늘 그 일을 해보았으나 잘 진전되지 않고 방해나 공격이 들어온다면 적절한 때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안감이 증대할수록 빨리 결과를 알고 내 손 안에서 상황들이 관리가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은 일을 밀어 부친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인내심과 강인함은 적절한 무심 안에서 자라납니다. 

적절한 시기를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겠지만, 전체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질 때, 결과도 좋고 무위자연의 진리가 실현됩니다. 우주의 근원 원리는 조화와 내 중심의 의도와 필요에 반응하는 에너지입니다. 이렇게 명상적 삶의 태도를 이해한다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내 몸과 마음이 봉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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