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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신으로 살기(18)

자기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기

3-8. 자기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태도를 사랑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면 분명 어디선가 길을 잃은 것입니다.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감추거나 왜곡하려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타인과 비교하며 외모나 성격 직업이나 환경에 부족감을 느끼지만 우월감으로 포장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는 껍데기에 불과하니 이 껍질들을 하나씩 벗겨 갈 때 진리와 만나듯이 자기가 살아온 것이 실수투성이라 할지라도 조건 없이 다시 시작하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무조건 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나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과 신뢰의 대상으로 나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대상을 밖에서 찾기 이전에 ‘나’라는 존재 –외부로 드러난 마음이나 몸이 아니라 –를 사랑과 신뢰의 대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기 신뢰를 못하는 상태를 타인에게는 아닌 척 속일 수는 있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이는 내면의 의식이 살아 있기 때문이므로 걱정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잘잘못을 논하는 것은 세상의 법이고 존재의 세계에서는 조건 없이 그냥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은 진리의 법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세계는 자신에 대해 부족감을 느끼며 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하다.’ 혹은 ‘실수다,’ 하는 것은 상대적 개념일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에 유난히 민감해져 간다면 잠시 길을 잃은 것입니다. 혹은 타인의 불완전함과 부정적 태도에 민감해져 간다면 의식의 힘이 작아져 좁은 생각에 몰두하게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타인이 유난히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옳고 그름의 잣대로 자기 자신도 오직 그 가치판단에 결박되어 미묘하게 부정적인 에너지에 몰입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럴수록 나로 돌아가 원인을 이해해줘야 내 마음도 성장하고 타인을 일깨워 줄 방법이 보이게 됩니다.


 의식이 깨어날수록 옳고 그름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생명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면 부정적인 분별심 대신에 그런 기회를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만큼 타인도 존중하게 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안과 밖이 둘이 아니다.’ 하는 말입니다.



3-9. 인생을 길게 보고 마음의 씨앗을 잘 뿌립니다.


 사회적 가치관에 쉽게 휩쓸릴 때마다 ‘이 상황을 내가 원하는 것인가?’ 되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싸움을 하게 되거나 오해를 받거나 곤란에 처했을 때 지금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다시 똑같은 일을 겪게 되리란 자각이 필요합니다. 똑같은 우물에 계속 빠져 허우적거리다 겨우 빠져나온 듯 싶지만 내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다시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입자이며 파동인 전자는 파동에 간섭하게 되고 파동은 고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파동은 알아차리면 변화하는데 인간은 인내심과 재입력하는 반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나는 이런 일을 계속 만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면 새로운 씨앗을 뿌릴 때가 된 것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성장과 성공을 향해 가는 것은 과거에 뿌린 씨앗이 자라나 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 행복한가 아닌가는 긍정과 사랑의 씨앗을 힘들어도 계속 뿌리고 돌보는 사람이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단순히 참는 것은 변화를 이끌 수 없습니다. 깨어서 진리 쪽으로 문을 여는 노력은 개인의 몫입니다. 이때의 진리를 아주 단순하게 실천적으로 표현하면 어둠이 아닌 빛 쪽으로 마음을 꾸준히 여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불행과 고통을 반드시 참아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보낸다면 변화가 적습니다. 불화가 고통의 원인이라면 화합과 용서를 꾸준히 표현하고, 가난이 원인이라면 구체적인 노력과 희망을 함께 나누고, 원하는 방향으로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발전된 조화를 위해 가는 것이 명상입니다.

 인간 존재와 삶은 외롭습니다. 나라는 외로운 개체로서의 노력으로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연히 좋은 일이 생긴 것은 나의 힘이라 생각하며 그냥 지나치곤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공과 성취는 존재의 힘이 즉 신성의 힘이 작용한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날 뻔했지만 피했다던가, 자칫하면 사기를 당할 뻔했는데 알아차렸다든가 위험한 순간들에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파동이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해 사고가 난 것은 본인의 깊은 곳에 파괴적 에너지나 고통을 끌어들이는 잘못된 습관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c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a라는 사건과 b라는 결과를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장의 결과는 b이지만 전체를 통찰해 보면 c라는 결과도 숨어 있거나 드러나는 것이지요. 어떤 사건도 한가지 결과를 가져오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고의 좁은 눈으로 보면 눈앞의 결과가 좋기만을 바라겠지만 한 마리의 나비의 날개 짓이 어디로 가서 어디까지 영향을 주는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단은 오늘 나에게 일상이 주어지고 무탈하게 보내고 나아가서 좋은 일이 있다면 신성과의 연결이며 전체 존재계가 나에게 허락되어 일어난 일입니다.

 의식이 성장할수록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용서와 이해가 쉽게 일어나 분노는 사라지고 사랑이 성장합니다. 신성과 연결이 될수록 욕망보다는 순수한 감사와 기쁨이 삶을 이끌고 가게 됩니다. 본래 기쁨이나 감사는 굳이 마음으로 해석한다면 의식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건과 고통은 배움을 위해 찾아옵니다. 내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행위로 반복만 한다면 이 상태는 반복될 것이며 겸손이나 깨우침의 과정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고통스런 일들을 존재계의 사랑으로 보고 받아들이기까지 에고는 거부를 하겠지만 무언가 나 자신이 배우고 나서야, 넘어서게 되어 반복이 줄어들다가 멈추게 되곤 합니다.


 누군가 오쇼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하자 ‘삶이 이전과 달라져야 깨달은 것이다.’ 하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삶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잠시동안 행복한 체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곧 사라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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