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그 모순적 언어 1/4
2024/11/14
오늘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일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걱정과 두려움을 견뎌내야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 믿고 의지하려 했을지 모릅니다.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어느 현자의 말씀이 있지만 정녕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내일의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터키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인류 유적이라는 괴베클리 테페는 수렵 채취 시대 혹은 농업혁명 초기 시대의 고대인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놀랄 만큼 웅장하고 정교합니다. 실용적 용도가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에 집단적으로 절대자에 숭배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의 삶이 두려운 것은 수렵채취 시대의 인간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대자의 존재를 그려내고 그것이 종교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함께 공유하는 스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집단이 공유하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인 신을 중심으로 하는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고 믿고 따르게 될 때 그것이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스토리가 바로 성경 혹은 경전입니다.
독실한 신자분 중에서는 자신이 절대적 가치를 두는 성서가 인간이 만든 이야기라는 데에 발끈하시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해서 종교나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신앙과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믿음의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신과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은 영적인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또한 영적인 체험 없이 신앙과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종교의 경전은 영적인 경험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통로입니다.
저의 크리스천으로서 체험의 바탕에서 본다면 성경은 믿지 못할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진실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믿지 못할 것을 믿고자 하는 자들을 영적인 체험으로 연결하는 튼튼한 다리가 되어주었기에 2000년을 면면히 이어온 종교가 되었다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제가 언제나 인간이 가지는 온갖 문제의 본질을 생각해 보고자 할 때 들취보는 하라리의 명저입니다. 다시 한번 그 통찰력에 감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