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그 모순적 언어 3/4
2024/11/21
제가 가톨릭 세례를 받은 것은 LA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다음 해인 1983년 부활절 무렵 한인 성당에서 입니다. 벌써 40여 년 전 일이네요. 종교가 무엇인지 생각 한번 해보지 않았던 제가 단지 생면부지 유학생의 LA 정착을 도와주었던 교포분의 권유로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쁜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교리 공부마저 면제받고 받은 세례이다 보니 거의 백지상태로 이름만의 가톨릭 신자가 된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머지않아 성당과는 아득히 멀어진 냉담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압박도 적지 않고 학업도 간신히 따라가는 상황에서 주일마다 멀리 떨어진 성당에 가거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겉으론 드러나는 냉담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창세기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구절에서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와 전혀 반대되는 가치를 강요하는 듯한 말씀에 반발심이 치솟기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간신히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을 했습니다. 대학교수직에 경제적 안정을 얻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는 했지만 마음속은 점점 더 공허해지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의 성공과 함께 당연히 왔어야 할 행복과 마음의 평화는 오히려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불평은 늘어났습니다.
마음이 아주 메말라 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가톨릭 '성서못자리'라는 성경 공부 교실에 등록을 했습니다. 봉사자 분의 인도로 성서 구절마다의 의미도 새로 배우고 성령세미나에 참여하여 영적 체험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왜 불행했고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번개 치듯 찾아왔습니다. 제가 불편해했고 반발했던 그 성경 구절이 행복을 진리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질 수 있다는 그 모순의 진리 말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 죽은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저 나름의 해석입니다. 오늘 행복해짐으로써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 내가 죽고 낮아지고 없어짐으로써 오늘 나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에서 저명한 성서학자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리스토교 신약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니까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만 하더라도 1세기말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 필사로 쓰였고 15세기 활자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계속 필사로 전해왔습니다. 구전과 필사과정에서 오류가 없을 수 없고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오류와 왜곡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진리의 책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