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탐구 역량을 길러주자!
다른 교과와 비교해 과학 수업의 가장 큰 차별점은 실험수업이라고 하겠다. 어느 학교든 기본적으로 실험실을 갖추고 있고, 특별실에 따라오는 예산도 있다. 학생들도 대개 교실 수업보다는 실험실 수업을 선호한다. 우리 학교는 물화생지 각각 네 개의 실험실을 가지고 있고, 관리도 깨끗하게 되어있으며 예산도 넉넉한 편이다. 과학과는 한 학년 전체에 교재를 제본해 주고도 예산이 남는데 사회과는 교사 한 명이 사용할 예산도 부족하다며 동료 선생님께서 불평하기도 했을 정도니, (교과마다 상황이 다른 것은 안타깝지만) 덕분에 어지간한 실험 기자재들은 모두 구비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퀄리티 있는 실험들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과학 교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건이지만 나는 생물실을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그저 실험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학부 때 아무리 많은 실험을 해봤다고 해도, 누가 준비해 준 실험을 따라 하는 것과 내가 직접 준비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은 큰 차이다. 임용고시조차 실험 평가를 피해 경기도로 응시한 마당에 30명 넘는 아이들과 함께해야 하는 수업에 자신이 있을 리가. (게다가 꼭 실험수업을 하지 않아도 진도는 나갈 수 있으니까.) 어떤 학교에는 실무사 선생님이 계셔서 실험에 필요한 준비부터 뒷정리까지 모두 담당해 주신다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순전히 교과 교사의 몫이다. 여러 반 여러 차시 수업을 매번 생물실에 준비하는 것도 부담스러울뿐더러, 두세 시간 연강인 날에는 10분밖에 되지 않는 쉬는 시간 동안 실험실을 정리하고 다시 세팅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나마 첫 해에는 문과반 생물 수업을 맡아서 아이들이 수업 자체에 흥미도 불만도 없었던 것이 매우 다행이었으리라.
하지만 과학 교육에서 실험과 탐구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 지 모르는 과학교사는 없다. 무엇보다 내가 과학을 좋아했던 이유가 바로 실험이었기에, 얼른 내 수업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음 한 켠을 늘 옥죄고 있었다. 조금씩이나마 실험수업을 시도해 보자는 마음이 든 것은 2년 차가 되면서부터였다. 입시를 준비하는 고3 이과반 아이들에게는 생기부에 들어갈 탐구활동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내가 손 놓고 있으면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불이익이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2024/ DNA 전기영동을 통한 범인색출 모의실험
우리 학교는 4월 말에 하루동안 학교자율과정을 운영한다. 1, 2학년은 외부강사를 초청해서 진로특강을 하지만, 3학년은 교과교사가 강의를 개설하고 아이들이 신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간단한 실험 수업을 해보기로 했다. 초보 교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실험수업은 완성된 키트를 사용하는 것이다. 생물나라에서는 DNA 전기영동을 활용해 모의 수사를 하는 실험키트를 구매할 수 있다. 간단한 스토리지만 아이들도 재미있게 해 볼 수 있고, 마이크로피펫 사용법과 전기영동의 원리를 포함해 분자생물학 실험의 기초를 학습할 수 있는 좋은 교재다. 아무리 키트가 있다한들 필요한 기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테지만, 작년 수리과학부장님께서 그동안 원심분리기, 볼텍스 믹서, 전기영동 기기, PCR기기, 일루미네이터, 등등 많은 기자재들을 구비해 두셨기에 장비의 제약 없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처음 실험을 지도했던 소감을 돌이켜보면 뭔가 묘하다. 당연히 알아야하는 것들은 잘 모르고 되려 모를 법한 것들은 알고 있었다고 할까. 현미경이나 마이크로피펫 같은 기구들은 잘 몰라도 제한효소나 전기영동에 대해서는 약간이나마 알고 있었으니, 아이들이 과학을 공부하면서 지금껏 실험보다는 문자화된 지식만 쌓아올리고 있었다는 것일지. 중학생 때 실험실에 들어가보지도 못했다는 학생이 있었으니, 아직도 학교가 팬데믹의 후유증을 겪고 있음은 자명하다… 어쨌거나 손에 연필이 아니라 피펫을 잡는 것만으로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빛내는 아이들이다.
2024/ DNA 전기영동을 통한 혈액형 판정 실험
5월 어느 날 우리 반 아이들이 학생 주도성 프로젝트를 지도해 달라며 찾아왔다. 유전자를 활용한 실험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당시 내가 전기영동에 빠져있던 상태였기에 대학생 때 실험 워크숍에서 들었던 혈액형 판정 실험을 알려주기로 했다. 교육과정 상에서는 주로 혈청을 이용한 항원-항체반응으로 혈액형을 판정한다. 그러나 입안상피세포로부터 혈액형 DNA를 추출하여 전기영동을 하면 같은 A형이라도 유전자 수준에서 AA형인지, AO형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욕심이 앞선 탓인가. 갑자기 난이도 있는 실험을 지도하려니 준비 과정에서 허둥대는 일이 많았다. DNA를 PCR로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프라이머(시발체)를 제작해야 한다. ABO 혈액형에 맞는 프라이머를 디자인해 주문하면 업체에서 분말 형태의 프라이머를 보내준다. 이제 이것을 특정 비율로 DNase Free Water에 희석해 사용해야 하는데, 막상 프라이머를 받았을 때는 '이걸 어쩌란 말인가'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물론 구매한 시료의 정보가 적혀있는 스펙시트를 함께 보내주지만, 그게 뭔지 잘 몰랐던 나는 그 종잇자락을 시원하게 내다버리고 한 달이 지나 다시 요청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아이들도 어설프긴 매한가지라 DNA를 추출하는 단계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프로토콜을 따라 몇 번이고 상피세포를 채취하고 다시 침전시켜도 흰색 DNA 띠가 나타나지 않다가, 한 시간쯤 지나서 아까 버렸던 튜브를 확인하니 느닷없이 DNA가 나타나는 등. 자신들이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미지의 현상 속에서 좌충우돌 오류의 원인을 찾아 헤맸다. 어찌저찌 제한효소 처리와 PCR을 거쳐 전기영동을 실행하긴 했지만 결국 우리가 원했던 DNA 패턴을 관측하지는 못했으니 결과를 놓고 보면 대실패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아이들 나름대로는 만족한 것도 같은 것이, 실험 자체를 즐기고 다음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이 자꾸만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 만져보지 못했던 기기들을 마음껏 사용해 보는 경험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값진 시간이 아니었을까. 아마 지금은 대학교에서 훨씬 능숙한 솜씨로 실험을 해나가고 있을 것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 나도 마찬가지다.
2025/ 양파 표피세포 삼투 실험, 먹장어 해부, 멜론 잡종 교배
조금 자신감을 가지고 올해는 더욱 다채로운 실험들을 시도하고 있다. 이번에 생2를 함께 가르치는 동교과 선생님께 실험수업 한 가지를 꼭 넣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자 흔쾌히 들어주셨다. 그 결과 수행평가 항목으로 양파 표피세포를 이용한 삼투 실험이 포함되었다. 작년처럼 거저 주는 수행평가가 아니라서 아이들이 알면 불만을 쏟아냈을지도 모르지만 막상 해보면 교실 수업보다는 훨씬 재밌을 것이니라... 수업 중 가장 행복했던 일은 '이런 걸 하고 싶었어!'라는 어떤 학생의 외침.
학교자율과정에서는 발령동기 선생님께서 공유해 주신 먹장어 해부 실험을 성황리에 마쳤다. 특히 의약학 계열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았는데, 리로스쿨 수강신청 당시 무려 5초 만에 마감된 초인기 수업이었다. 수강 명단을 보니 20명 학생 중에 2명만 남학생이라, 여학생들이 과연 징그러운 생물 해부를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또 한 가지는 멜론 잡종 교배 실험이다. 작년 동기모임에서 식물 분류와 교배에 일가견이 있는 대학 동기가 학교에서 멜론을 키워보지 않겠냐며 씨앗을 건네줬다. 내용인즉 동기가 획득한 잡종 식물의 형질을 관찰하고 또 다른 품종과의 교배를 통해 새로운 잡종을 만들어보라는, 꽤나 심도 있는 연구다. 바로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이를 학급특색활동으로 기획했다. 씨앗부터 열매까지 한 사이클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라 식물을 죽이지 않고 길러내는 것이 관건이다. 처음 심었을 땐 예상보다 발아가 늦어 걱정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탈 없이 잘 자라고 있다. 앞으로 텃밭에 옮겨 심고 새와 해충으로부터 이 녀석들을 보호하며 키워야 하니 갈 길이 참 멀다. 성공을 장담할 순 없지만, 다 떠나서 학급에 화분 하나 기르는 것이 아이들 정서에는 도움이 되겠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학문중심 교육과정의 신봉자다. 과학은 앉아서 책만 들여다보는 글공부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직접 현상을 경험하며, 이유를 궁금해하며, 자발적으로 답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내재적 동기를 유발하고 지식을 확장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자의 연구활동과 학생의 학습활동은 동일한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교사는 학생의 자발적인 학습을 조력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작년 서울대에 진학한 학생의 생기부를 분석했을 때 내가 생각하기에 특별히 우수했던 부분은 과학적 연구 방법을 능숙하게 사용했던 아이의 연구역량이었다. 다른 선생님들보다 부족한 경력과 데이터로 성과를 보여야 하는 나는 올해 맡은 아이들의 역량을 그 학생과 비슷한 수준으로 길러내자는 목표를 잡았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배워오기 위해서 경기도 생명과학교육연구회에 가입도 했다. 마침 연구회에 대학 동기들도 여럿 함께 들어왔으니 이 친구들과 수업 사례를 공유하며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학생이 대학에 합격하는데 담임이 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나, 그냥 운 좋게 실력 있는 학생이 학급에 있었을 뿐이지 교사의 능력이 아니다, 가타부타 회의적인 시선도 종종 경험했고 나도 일견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학생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학교의 교사들이다. 서류에서 탈락했을 학생에게 면접의 기회를 잡게 해주고, 동점끼리의 경합에서 미세한 차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교사의 노력도 그리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학문 자체를 올바른 방법으로 가르치고 즐겁게 만들어주려는 교사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