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러도 고마워!
5월은 일 년 중 가장 생기가 넘치는 달.
지난 두 달 동안 당초 다졌던 각오는 조금씩 풀려가고, 아이들은 새 학년에 완전히 적응해 이제 일상이 된 수험생활을 그럭저럭 보낼 뿐이다. 이맘때쯤 1, 2학년은 한창 체험학습 장소를 정하랴, 체육대회 입장식을 연습하랴 지루할 틈이 없지만, 3학년들은 이런 행사에서 배제된 채 묵묵히 공부하는 모습이 참 안쓰럽기도 하다.
...... 면 차라리 좋으련만!
여전히 점심시간이 되면 혈기 왕성한 아이들은 공을 가지고 뛰쳐나갔다가 땀에 흠뻑 젖어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 아무래도 올해 남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을 순순히 후배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복도에선 커플들이 짝지어 돌아다니고, 들려오는 대화는 공부보단 게임과 아이돌, 어제 치러진 야구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거기다 이번 달엔 졸업사진 촬영이나 학교자율과정 같은 3학년을 위한 행사들도 예정되어 있어, 우리 청소년들은 별안간 분주해진 학교 공기에 늘 휩쓸리고 만다. (나의 고3 생활도 뭐 비슷했기 때문에, 절대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매년 나를 긴장하게 하는 스승의 날이 찾아온다.
학생들이 보내주는 관심은 언제나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부담스럽다. 경상도 출신에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어떤 축하나 감사를 받아도 리액션이 서투른 나는, 스승의 날 열심히 준비한 아이들의 기대에 마음만큼 크게 반응해주지 못해 미안한 기억뿐이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준비해주지 않으면 또 섭섭할 것도 같고. 이래도 저래도 걱정뿐인 매우 불합리한 날이다.
조회시간 반으로 들어가는 길에 슬쩍 창문으로 엿보니 칠판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심 안도하며 교실로 들어가 평소처럼 아침조회를 하고 교무실로 돌아왔는데, 마침 교무실 안에 있던 한 아이가 불쑥 편지와 간식이 든 종이가방을 건넨다. (내거야??!!)
2년 전 신규시절 첫 담임을 맡았던 그 아이는 마치 훌륭한 문학작가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풍부한 감성과 글쓰기의 재능을 지닌 학생이다. 하필 1학년 종업식 날 출장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을 때, 문자메시지로 장문의 감사인사를 전해와 누구보다 기억에 남는 아이였다. 나에게 교사로서 이 이상 예쁜 아이가 있을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올해는 교무실 선생님들께 만장일치로 추천을 받아 2025년 용인시 모범청소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 담임도 잊지 않고 챙겨줘서 고마워❤
각 반마다 한바탕 준비한 이벤트가 정리되면 곧 학교는 평소와 같이 굴러간다. 이번 스승의 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싶었는데, 여러 반 아이들이 모여서 듣는 이동반 수업에서 일이 났다.
"쌤~ 12반 롤링페이퍼에 저도 한마디 쓰려고 했는데~"
한 아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우리 반 아이들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린다. 주변의 눈초리를 감지했는지 말을 꺼낸 아이는 아차 싶은 표정이 역력하다. 이럴 땐 나도 극한의 표정관리가 필요하다.
"우리 반 롤링페이퍼 있어요??ㅎ"
기특하기도 귀엽기도 한 당황한 그 기색이 너무나도 웃겨서 수업 내내 참느라(사실 거의 참지도 못했지만) 아주 혼이 났다. 그래도 아이들이 무안할까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본다.
"인생이 뜻대로는 잘 안되죠?"
사실 이 날은 오후 수업이 없어 조퇴를 쓴 날이었다. 요 근래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잠깐 병원에 들렀다가 종례시간에 맞춰 돌아가려고 했는데, 복귀가 늦는 바람에 소문으로만 듣던 롤링페이퍼는 받지 못했다. 아이들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돌발상황이었을지도! 결국 하루 늦게 편지를 받았지만 이미 그 마음은 전해질만큼 전해졌고 덕분에 하루 종일 행복했으니 충분히 훌륭한 이벤트였다❤
작년 졸업한 제자들도 잊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몇몇은 학교로 직접 찾아온 아이들도 있어 그간 어떻게 대학생활을 해왔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듣자 하니 첫 중간고사를 잘 치르고, 동아리에 연애까지 아주 훌륭한 새내기 시절을 보내고 있다. 졸업시킨 다음날부터 그리워했던 아이들. 지금 아이들에게 신경을 쏟느라 잊고 지냈었는데 또 이렇게 반가운 걸 보니 내가 생각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새삼 느끼기도 한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작년보다 친구같은 선생님이 되어가고 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마다, 교육이라는 쓸데없이 거창한 사명감이 대답을 망설이게 한다. 나의 바람만큼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일장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아이들과 가깝게 지내보자던 올해의 다짐을 재차 떠올리고는 후회한 적이 이미 여러 차례다. 모든 학생들의 욕구가 동일하지는 않을텐데 나는 교사라는 이유로 왜 이리 공부하는 모습에 집착하는지. 즐겁게 지내고 싶은 아이들이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나는 이 근원적 책임의 본질에 대해 갈등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처럼 대가 없이 여린 마음을 선물하는 녀석들을 보면 하루쯤은 모른 척 바람을 들어주고도 싶다. 그 바람에 나도 답 없는 고민을 잠시 잊고, 과분하지만 '선생님'으로 불러주는 아이들에게 늦은 감사를 표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