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일기) 난임으로 산다는 것
난임 3년간의 고군분투기
나는 난임이다.
난임을 인정하기까지, 즉 난임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 받고 스트레스 받는지를 직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임신이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어’, ‘나 자신의 삶이 없으니 아이 갖는 데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여기 삶에 집중하자’고 간절히, 수없이, 주문처럼 되뇌었다.
하지만 마음은 다잡아지지 않았고 ‘난임’이라는 기간과 마음 속 표적 없는 분노는 비례했다. 심각성을 자각했을 무렵 주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저 이번에 꼭 임신 돼야 하니까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보통 이런 말은 임산부가 많이 하는 말이라고 하던데… “저 지금 임신 중이니까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라고. 나는 임신이 되기도 전에 ‘임신(을 위한) 유세’ 중이었다. 날 아끼는 사람에게조차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내 상처를 내보였다. 그럼에도 임신은 되지 않았고 나는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난임 여성이 겪는 스트레스 지수는 암을 선고 받은 환자의 심정과 맞먹는다고 한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태는 곧 자존감과 직결되며 마치 무능한 인간이 되는 것과 같은 감정상태에 휩싸이기 때문이리라. 나의 경우 일상의 모든 행위가 ‘임신’이라는 목표를 위해 헌신했다. ‘임신’이라는 키워드가 단 한 순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일상을 살아내는 기준은 ‘임신에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로 나뉘었다. 술, 찬 음식 등 즐겨하던 것이 금지되고, 익숙지 않은 것들을 우걱우걱 일상에 초대했다. 심지어 감정상태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은 생식기능을 중단한다”는 말에 따라, 난임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실 자체에 대해 또 다시 스트레스를 받았다.
우연히 난임 온라인 커뮤니티의 오픈채팅방에 들어갔다. 나와 같고도 다른 사람들. 몇 년째 임신을 기다리는 사람, 유산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 이제 막 임신을 기다리기 시작한 사람, 길고 긴 난임의 터널을 지나 임신에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와 입장의 그들은 나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였다. 오프라인 번개모임을 가졌던 날, 오랜만에 깔깔깔 웃었고 난임으로 스트레스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괜찮다고, 다 이해한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것은 평소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이 의도치 않더라도 난임 상태를 깊숙이 의식하고 있는지를 방증했다. 이를테면 아이가 있거나 임신 중인 사람을 만나면 부러움에 지배당했다. 임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너는 날 이해할 수 없겠지’라며 스스로를 소외시켰으며, 나의 임신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자책감과 언젠가는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인정욕구로 몸서리쳤다. 결국 누구를 만나든, 뼛속 깊이 난임을 망각하거나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약자는 힘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결혼은 했는데 아이가 없는 것 역시 아이에 대한 사회적 집착이 큰 이 사회에서는 결핍된 상태, 즉 ‘사회적 약자’ 처지에 속한다.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남들로부터 오해를 사고 부당한 질문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여느 소수 집단과 같다. 부당한 질문들의 특징은 질문에 이미 질문자의 편견이 포함돼 있으며 나의 대답과 상관없이 답은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왜 아이가 없어?”라는 질문.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두는 것이 정상적인 삶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난임부부는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매도당하기 일쑤다. 사정을 고백하더라도 “병원 가서 적극적으로 시술을 받는 건 어때?” 따위의 질문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질문에 이미 아이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시술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거듭 실패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것만 같노라고 정직하게 대답하면 질문자의 얼굴에 떠오를 낭패감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답할 수 없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아이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느낀 단적인 일화가 있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아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자식이 없어서”라고 단정 짓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다. 가십의 대상이 된 사람은 난임으로 인해 딩크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을 결핍하게 되면 그 사람의 행위는 결핍의 결과로 설명되곤 한다. 이를테면 난임 여성이 자주 듣는 말 중 ‘저러니 애가 안 생기지’가 있다.
아이 없는 삶,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길 소망하며
이런 질문이 있다. “어떤 결정을 해도 애매할 때는 당신이 룩셈부르크 같은 낯선 데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거기선 아무도 당신을 몰라요. 그럼 어떤 결정을 할래요?” 내가 룩셈부르크에 있어도, 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이를 가지고픈 욕망은 정말 내 것이 맞는가?
아이를 갖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욕망이다. 30대가 된 지금, 삶이 조금은 지치고 고단하며 지루하다. 애를 써도 새로운 열정이 생겨나지 않는, 과도기이자 정체기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 끝에 부모-자식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존재의 탄생이라는 경이로운 기적을 경험하고 그를 온전히 책임져보는 것, 돌보고 싶은 마음, 한 존재를 키우고 그로 인해 나 역시 성장하고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일.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는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다.
하지만 역시 임신은 계획대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역시 배란 4일차로, 내 자궁에서는 한창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하며 착상을 준비하고 있거나, 수정조차 못하고 생리를 준비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터다. 마음 한켠에서는 실패를 100% 확신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지난 열 두 달이 넘도록 완벽한 실패를 반복한 사람의 익숙한 체념이다.
더 이상 기약 없는 희망고문으로 스스로를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 않다. 일기장에 온통 임신에 대한 생각을 나열하는 일을 그만 두고 싶다. 아이를 갖는 것에 열중하기보다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온전히 아끼고 사랑하고 싶다.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이 아닌, 아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이미 온전하다고, 설령 아이 없는 삶도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오늘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임신이라는 닿지 않는 꿈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기 위해 수양 중이다.
(*2018년 12월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