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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19. 2022

훈육이 기싸움이 되지 않기 위해 생각해야 할 것들

아이의 공격에 ‘의도’를 판단하지 말라

이따금 한 번씩, 아니 가끔씩 자주, 아기는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한다. 오늘 저녁만 해도 그렇다. 아기가 간식으로 포도알 몇 개는 곧잘 먹더니 한 개를 삼십분째(체감상 한 시간) 입에 머금고 있는 것이었다. 성격 급한 나는 얼마간 참지 못하고 부아가 치밀어올라 화를 냈다. 분노하는 내적인 명분은 분명했다. (1.치아에 좋지 않으니까 2.꼴보기 싫으니까) 사실 아기에게 화를 내는 쉬운 방법이 아닌, 머리를 굴려 유하게 포도를 뱉도록 유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평소처럼 아기가 먹고 싶어할 만한 다른 간식을 준다거나 화제를 돌려 다른 놀이로 유도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의 내 상태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연일 지속되는 독박육아에 지쳐있었다. 은연중에, 무슨 보상심리처럼, 조금은 아기에게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어도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너무 지나치게 잘해줄 필요 없어’. 한번씩 나는 내가 어릴 적 받지 못한 세심한 돌봄에 비추어 아기에게 쏟는 애정을 저울질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어쨌거나 오늘 저녁의 나는 아기의 욕구를 ‘훈육’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곧이곧대로 들어주고 싶지 않았고, 일방적인 지시 이상의 감정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방향의 방식이 통할 리가 없었다. 포도를 뱉으라는 명령의 톤이 올라갈수록 아기의 저항 역시 격렬해졌다. 어느 순간 훈육은 기싸움이 되어버렸고, 아기는 앙앙 울기 시작했다. 결국 항복 선언, 포기하고 휴전을 선포하고 평정심을 되찾으려 책을 읽는 척하며 조용히 분을 삭히는데 아기가 다가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벌린다. “다머거쪄^^” 우리집 아기님이 속좁고 아집에 가득찬 엄마를 뒤끝 없이 용서해준 것이다.


사실 평소 같으면 ‘이 영악한 녀석 같으니라고!’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얼마 전 어린이집에서 수강한 훈육에 관한 강좌가 떠올라 금방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강사는 참가자에게 아기의 부정적인 행동 몇 가지를 제시하며 우리집 아기가 평소에 하는, 공격적인 의도를 가진 행위를 고르라고 했다. 1번 꼬집기 2번 던지기 3번 때리기 4번 ??(기억안남) 심혈을 기울여 2번과 3번 중 하나를 고르려던 차에 강사 왈, 정답은 “없다”였다. 띠용! 아기가 어떤 공격적인 (본질은 ‘공격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할 때, 아기는 그 행위의 의도와 의미를 알고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보고 들은 행위를 재현하거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다소 ‘영악해 보이는’ 행동도 그저 어른의 시선일 뿐,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셈이다.


가만 보면 아기가 평소에 하는 2번과 3번은 나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건을 토스하려는 목적으로 아기 앞에서 아빠에게 무언가를 던지는 행위, 아기에게 화가 날 때 씩씩거리며 궁디팡팡 하는 행위를, 아기는 ‘별 뜻 없이’ 모방하고 재현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 행위를 보고 나는 부모의 잣대로 ‘무엄해하고 괘씸해하며’ 아이를 재단하고 판단하려 드는 것이다.

 

육아를 하면 할수록, 결국 문제는 아이로 시작해서 부메랑처럼 ‘나’로 돌아. 아이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정직한 진실에 마주하게 된다. 오늘도 새삼 느끼는 씁쓸한 깨달음은 ‘나나 잘하자^^’. 그날의 강의교재를 보니 훈육이란 “아이가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닌, 아이 스스로 자신을 잘 다스리고 남을 배려하는 아이로 성장시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정의 내렸데, 과연 나 자신부터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타인을 배려하고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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