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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02. 2023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인간이 되는 연습

《예술의 주름들》(나희덕, 마음산책)

“감각을 일깨우는 시인의 예술 읽기”라는 컨셉으로 세상에 나온 이 책은 시인인 저자가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목록이다. 그 범주는 실로 다양하며 영화로 시작해 회화, 음악, 설치미술, 조각, 평론 등으로 이어지는,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 언어에 대해 내 안의 시적 자아가 감응한 기록”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아무래도 열등감이 많은 인간이라는 점을 재차 느꼈다. 저자가 소유한 취향의 세계는, 아무래도 한낱 글쓰기를 업으로 삼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이의 고유한 영역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고 비아냥 대면서. 또한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해외의 예술가들 상당수는 현지 미술관을 방문했다는 점에서, 나이 예순이 다 된 저자에게 또다시 유치한 질투심을 느꼈다. 적어도 본문의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목차에 언급된 서른 한 명의 예술가 중 내가 귀에 낯익은 이는 단 여섯명 뿐이었고, 나 역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예술가는 단 한 명, 영화감독 짐 자무시였다. 도대체 이런 다방면의 취향은 어떻게 만드는 거야? 이생망이군, 하며 투덜대면서도 놀랄만치 몰입하며 읽었다. 책 서문에서 저자는 선언한다. “아름다움이란 늘 바깥에 있는 어떤 것,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 저자 역시 나처럼 이 서른 한 명의 예술가들에 대해 “가보지 못했던 길에 대한 선망”이라는 솔직한 속내를 고백하면서도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을 발견하게 해준 스승들”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다시 보니, 이 책은 ‘아름다움’을 향유하기 위해 시인인 저자가 적극적인 독자를 자처했던 기록이기도. 나는 전시를 관람하러 해외에 갈 형편이 안되는데?라며 냉소하기에는 작가가 다녀온 국내 전시관의 리스트가 촘촘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제주 비엔날레…. 일단 나부터 가까운 곳에 위치한 미술관과 친해지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는다.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태도는 부단한 노동(관심과 노력)으로 유지된다는 것. 예술을 향유하는 인간은 예술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나, 항상 아름답기를.


1.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뮤리엘 루카이저가 석판화가 <케테 콜비츠>에게 헌정한 시의 한 대목으로 한국사회를 뒤흔든 미투운동의 슬로건이 되었다. 내가 드러내고 싶은 내 삶의 진실과 고통은 무엇인가. 나는 두려움 없이 드러낼 준비가 되었는가?


2. “아무리 사람들이 너를 아프게 해도/울면서 헤매는 게 네 운명은 아니야.” 영화 <슬픈모유>에서 울려퍼지는 어머니의 노래. 삶의 진실은 고통에 있다. 책에 소개된 서른 한 명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고통을 나름의 방식으로 승화한 자들이라는 진실을 다시금 느끼며.


3. 정영창, 윤형근, 영화 <타인의 삶>, 존 버거. 나 역시 기억하고 ‘직접적으로’ 향유하고 싶은 예술가들의 리스트.


“관객들의 뜨거운 갈채와 함께 막이 내리면 그는 홀로 분장실에 남아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의 통곡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갈채는 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바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는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무대 위의 그림자를 살고 있는가?’ 이것이 통곡의 이유였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텅 빈 분장실에 홀로 남아 쏟아내는 그의 통곡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통곡은 그를 인간으로 세워놓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무야 나무야》(신영복)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신영복 선생님의 어떤 회고가 떠올랐다. 막이 내리자 쏟아지는 갈채가 결국 자신이 아닌, 배우 자신이 연기한 주인공을 향한 찬사인 것이며 자신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자각에서 오는 소외감으로 오직 자신을 향한 울음을 쏟아내는 사람의 이야기. 그건 주인공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나의 이야기였다.


주인공이 되지 못하더라도, 예술을 가까이에 두고 예술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라며 오늘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충족감을 느끼며 자위하는 밤이다. 결국에는 독자로 머무는 삶일지라도, 내 지면이 페이스북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아름다움은 영화 <패터슨>처럼 도처에 널려있는- 일상에,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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