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밀크맨>,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2022년에 읽은 책 중 일부를 기록합니다.
읽다 만 책, 사두고 안 읽은 책 읽기에 조금 더 힘을 내고 있다. 읽고 있는 책 목록에 있는 책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양으로 늘어난 것이 압박을 주기도 했고,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무리도 잘해야지 하는 다짐으로 <숨>도 마저 읽었다. 테드 창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후로 오래간만에 다시 집었다. 구매는 두 권을 같이 했으나, 각 중단편의 세계가 워낙 다채롭고, 몰입이 충분히 필요한 작가라고 느끼기도 했기에 연달아 쉬운 마음으로 읽기는 어려웠다. 편하게 다시 집을 수 없어서, <숨>이 읽다 만 책 목록에 있던 것이겠다.
수록작 중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부분은 길기도 길고 몰입할수록 피곤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많았던 터라 한 번에 많은 양을 읽기 힘들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가상 세계에서 반려 동물을 키우며 그 책임감과 미래를 계속 고민하는 관리자 및 유저, 아바타들의 이야기이다. 서비스의 시작부터 원치 않는 굴곡까지 모두 세세하게 다루기 때문에 소설이 주는 무게감이 압도적이어서 읽고 난 후에는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현실 관련 내용은 한동안 한 글자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도 인상 깊었다. 나는 테드 창을 읽을 때마다 작가가 '기술이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 두 개의 단편은 기술을 통해 자신을 어떻게 마주 볼 것인가, 또는 어떻게 왜곡하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나도 기술로 나를 왜곡해서 바라보고 있겠지. 아니, 정정해야지. 기술이 아니어도 사람은 스스로를 마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단편 속 인물들처럼 기술을 통해 나 스스로 어떤 부분을 왜곡하는지 깨닫게 된다면 서서히 무너지지 않을까?
김명남 번역가의 추천을 보고 읽기 시작했다. 좋은 번역가는 책 추천도 잘한다는 강한 믿음이 있고, <밀크맨>도 그렇게 시작했다. 책은 세상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 주변의 반응을 쉼 없이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하지만 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유쾌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도 읽다만 책 목록에 있었다. 감정적으로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졸리는 느낌에 지쳤다.
그래서 책이 아주 잘 쓰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매 순간 원치 않는 상황이고 바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지도 않을 만큼 몰입하게 하고 고통을 느끼게 한다. - 하지만 주인공은 시종일관 적당히 무디고 건조해서 이 공포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 내게는 공포가 너무 생생했다.
책의 배경인 아일랜드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읽었기 때문에 읽는 중간중간 그 역사들에 대해 찾아보았다. 물론 역사적 사건들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책을 읽는 데에는 문제없다. 주인공의 시선으로도 아주 많은 걸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 상황 안에서 개인에게 강요되는 삶과 태도, 감내해야 하는 고통들이 잘 쓰여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인공은 건조하고 유머러스하다. 그 덕에 공포에 질려가면서도 어찌어찌 읽어냈다. 다시 읽을 자신이 있을까? 확신하기 어렵다.
호프 자런의 <랩 걸>을 기대하며 읽었지만 <랩 걸>처럼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인간이 지구를 어떤 방식으로 망가뜨리고 있는지 알고 싶은가? 이 책을 추천한다. 인간은 온갖 방법을 통해서 지구를 착취하고 탐욕을 퍼트린다. 그럼 개개인으로서 지구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알고 싶은가? 마찬가지로 이 책을 추천한다. 아무리 적어도 한 개 이상의 방법에 대해서는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각기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각자가 무거운 추를 놓고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내게 중요한 것을 포기하라는 말은 윽박지르는 것처럼 들리더라도, 다른 조건이나 항목이 조금이라도 덜 중요하다면 그것을 조금 덜 누리는 방식으로도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호프 자런은 책에서 다양한 소재로 촘촘히 나누어 숫자와 추억을 적절히 섞어가며 세상의 변화를 짚어간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조금 덜 누리더라도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자'는 바람이라고 이해했다.
최근에는 환경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된다. 일부러 찾아 읽는 것은 아닌데, 읽고 있는 대부분의 책 - 기후, 지질, 동물 등 많은 분야 - 에서 환경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곳이 지구이기 때문이겠다. 다만 '이 지구가 없다면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자'는 말로 가득한 책을 읽고 있으면 기운이 쭉 빠진다.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어. 호프 자런의 책에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나온다. 호프 자런은 그들을 다독인다. 각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하자. 손 놓고 있지 말자고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