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를 따라간 상주적 여행자, 무라카미 하루키를 기억하며
그렇게 해서 나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문장을 써나가는 상주적 여행자였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 중에서 -
마흔을 앞에서 문득 먼 북소리를 듣고 유럽으로 떠난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3년간 유럽을 여행하며 자신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를 썼습니다.
<상실의 시대>를 집필하던 3년간의 하루키의 여행 일기, 여행 에세이인 <먼 북소리>의 머리말 맨 마지막 문장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를 따라 여행을 떠났지만 그 여행지에서도 결국 글 쓰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유영하듯이 살아가지만 글을 향한 그의 마음만은 한결같았나 봅니다.
<상주적 여행자>였다는 그의 말이 제 마음에 콕 박힙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저마다의 인생을 여행하면서도 자신의 본질과 삶의 의미 앞을 떠날 수 없는, <상주적 여행자>가 아닐까요?
어느 곳에서든 쓰는 인간으로, 쓰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하루키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느닷없이 이어령 교수님과 니체가 생각났습니다.
너무도 다른 시대와 상황을 겪으며 살았지만 ‘쓰기’라는 행위 앞에서 고민하며 자신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 둘이 생각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어느 날이면 ‘쓰기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눈앞에 주어진 상황을 핑계로 쓰기를 종종 부정하기도 합니다.
’ 경제적 자유를 얻으면 더 글쓰기가 쉬울 거야.‘
’ 내 서재가 있으면 쓰기 쉬울 거야.‘
’ 아이들이 더 크면 글쓰기가 더 쉬울 거야.‘
’ 일을 하지 않으면 더 글쓰기가 쉬울 거야.‘
’ 글쓰기 수업을 받으면 더 글쓰기가 쉬울 거야.‘
수많은 핑계와 이유 앞에서 현실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변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나니, 부끄러워집니다.
‘쓰는 사람’이란 주어진 현실 앞에서도 쓰는 삶을 갈망하고 인생의 모든 경험을 쓰기의 소재로 삼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쓰기를 위한 인생의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을 통해 쓰는 삶. 그것이 쓰는 삶이 아닐까?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내 현실을 핑계 대지 말고 조건을 만들어서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을 글로 녹여내는 사람이자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 봅니다.
비단, 글을 쓰는 일만이 아니겠죠?
자신이 꿈꾸는 삶을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행위를 매일 해나가는 삶. 그래서 자신의 삶을 꿈꾸던 현실로 만들어가는 사람. 늘 내 눈앞에 닥친 현실 너머의 <꿈>을 향한 상주적 여행자가 되는 일.
며칠 전, 놀이터에서 놀다가 정글짐 꼭대기에 올라서 환한 웃음을 짓던 아이가 생각납니다.
“선생님, 세상이 다 보여요!”
아이의 환한 웃음과 기쁨이 좋았고 한 켠으로는 앞으로는 더 멋지고 큰 세상을 더 많이 보게 될 아이의 경이로울 미래를 생각하며 함께 웃었습니다.
지금 책을 읽다 만난 제 마음과 결론이 어쩌면 그 아이처럼 정글짐에 올라서 세상을 바라보며 놀라는 기분이겠지요?
놀이터의 정글짐 꼭대기에 살짝 앉아보는 마음으로 책을 읽다가 ’ 쓰는 사람‘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내 삶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꿈>을 향한 상주적 여행자에게 책은 멋진 내비게이션이 되어 줍니다.
앞으로 계속 글쓰기를 해 나가면서 나는 어떤 쓰는 사람을 만나고 쓰는 삶을 어떻게 이야기하게 될까요?
사뭇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쓰기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