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남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을 읽으며
사랑하는 언니를 뜻밖의 사고로 떠나보낸 어린 소녀가 있습니다. 슬픔을 누르며 언니의 몫까지 더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합니다.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아온 소녀는 전문의가 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립니다. 개인 병원을 열기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온 삶. 이제 무언가를 좀 이루었구나 싶던 어느 날, 그녀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옵니다.
40대의 나이에 아주 빠르게 나빠지지 않지만 결코 완치되지 않고 나빠지기만 할 병인 ‘파킨슨 병’을 선고받습니다.
처음에는 걸음을 휘청이던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더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아 지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청천벽력 같은 절망스러운 선고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더 자기답게 꾸려온 저자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하루하루의 도전의 기록이자 분투였을 이야기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병의 선고를 받은 이후에도 그녀는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던 소녀의 그 마음 그대로 아픈 몸으로도 할 수 있을 만큼 진료를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금은 그림 전시회를 하고 10권의 책을 낸 작가로도 살고 있습니다. 아픈 몸을 좋아지게 하려는 대신, 남은 시간과 체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에 대한 성실함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누군가가 생각이 났어요.
제 주변에도 이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이가 있습니다. 바로 저의 시아버지이십니다. 책을 읽다가 4년 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거의 20여 년의 시간을 전신이 계속 무력해지는 병을 겪으셨던 시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며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남편의 고3 시절 즈음부터 겪던 시아버지의 병세를 알면서도 남편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시부모님의 온전하고도 성스러울 만큼 성실한 서로를 향한 사랑과 돌봄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도 병세로 인해서 불평을 하지 않고 오히려 두 아들이 이 세상에서 잘 자리를 잡기까지 소망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며 버티셨던 시아버지와 그림자처럼 그 곁을 정성스레 지키셨던 시어머님의 사랑이 참 놀라웠어요.
이런 분들의 아들이라면, 이 사람은 정말 너무 좋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결혼을 결심하게 만들었지요.
제가 큰 아이를 낳았던 날, 휠체어를 타고 불편한 몸으로도 두 번이나 병원에 와서 아이를 보시던 아버님이 생각납니다. 돌아보니, 송구스러운 마음이 커서 함께 많이 기뻐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아이가 커 가는 동안은 운 좋게도 같은 빌라의 1, 3층에 살게 되었어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는 시간이면 손녀를 빨리 보고 싶어서 베란다 창문 옆에 휠체어를 두고 기다리던 시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몸이 점차 마비되어 갈 즈음에는 누워계신 날이 많았는데 그때는 둘째 아이가 효녀가 되었었지요. 티브이 보며 누워 있던 할아버지를 뽀뽀해 줄 때 까르르 웃으시던 모습이 선하네요.
갑상선암을 판정받고 온통 걱정뿐이었던 저의 작은 아픔에도 절망하며 세상을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던 시절을 떠올리니, 나날이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는 의식이 선연하셨을 시아버지의 배려 깊은 사랑에 그저 감사하게 됩니다.
불평보다는 순간순간을 믿음과 기쁨으로 살아가던 아버님의 사랑 덕분인지 두 아들은 세상 속에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책의 작가가 일깨워준 덕분에, 자주 잊고 지내고 당연한 듯 여겼던 시아버님의 사랑과 인생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상의 하루하루가 어쩌면 시아버님에게는 온 힘을 다해 성실히 살고 버텨온 소중한 사랑의 흔적들 덕분이었던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당연한 듯 잊고 지낸 소중한 것을 일깨워준 작가님과 책의 힘에 그저 감사하게 됩니다.
문득 방문한 친정의 서가에서도 발견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 책입니다.
다시 보니, 참 멋진 제목의 책이네요. 이 책의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인생을 돌아보게 할 듯합니다. 그리고 용기 내서 이 책을 편다면 후회되는 나날, 절망스러웠던 나날, 두려운 나날들의 누군가에게 던지는 멋진 질문이자 희망의 노래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라는 질문 앞에서 제 인생을 반추하고 새롭게 바라보려 합니다.
늘 똑같다고 여겼던 일상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내가 매일 눈뜨는 아침은 새로운 하루이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인생입니다. 내가 당연한 듯 여기는 가족들과의 시간과 복닥거림도 세상에 다시 느끼지 못할 유일한 행복한 순간이지요.
아픔과 슬픔, 끝내 해결하지 못할 거 같은 마음의 문제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기회, 내 앞에 주어진 새로운 기회의 하루.
지금 내 앞에 주어지는 하루는 ‘내가 다시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