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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향선 Dec 15. 2024

교통복지...그림떡, un파견직...아파트분양가산점없어

내가 일을 제안할 줄 모르고있고 빚살좋은 개살구라고 합니다.


이젠 저도 너무 지쳐서 ....침묵하는 자는 아파트도 있고 사업체도있습니다. 가정교육도 제사도 필요없어서


일반 아아트에서는 제사을 지낼 공간도 사라지고 우리는 이제 아버지 어버니가 필요없다는 듯이 이야기 합니다.


어린시절에 국민학교 3학년 3월에 아버지는 여동생이 입하는 하는 날인가 좀 지나서


서울의 신림동에서 양복을 신문지에 말라서 나가며 우리을 다리에 건네고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해 보니 쌀이 없었나봅니다.


비가오는 날이어서 우산을 쓰고도 손이 시러워서 벌벌떨며 집에 왔는데


어머니가 국수을 오뎅과 계란으로만 끓여서 밥통에 넣어서 아랫목에 넣어두셨다가


제가 오니까 따스한 국수 한그룻을 건네 주었고 그후 어머니는 일을 나가시고


아버지가 없는데 신림극장에서 영화을 보여주고 우리 사진을 규칙적으로 찍었는데 아버지에게 보내셧나봅니다.


그후 아버지가 대전에 있다고 해서 방학때 대전에 동생들과 내려와서 여관에 한달을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그다음에 대전으로 왔습니다ㅣ.


대전은 아버지가 월평동 둔산동 위 육군 부대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하던 곳이기도합니다.


어려서 어머니가 우리와 같이 없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됏을까요?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이종사촌할머니가 우리 남동생들이


운동장에서 놀때 봐주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가족공동체가 허울어져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아버지제사에 놓던 은수저을 대전신세계 백화점에 가서 팔려다가 다시 가져왔습니다.



이 시대에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대전에서는 버스을 타면서 교통카드을 터치하는 대신에 계좌이체을 한다고 하면 버스운전사가 녹색카드을 건넨다. 그 카드에는 하나은행과 농협 두군데 은행계좌번호가 적혀있고 어른은 1700원 중고생은 900원 초등학생은 400원이라고 적혀 있다.



대전은 버스을 승차할때 현금을 받지 않는다. 지난 번에 약속이 있어서 전주 한옥마을에 가서 친구와 그녀의 일본친구을 만나고 오면서 버스을 승차하는데 현금도 받는다고 해서 동전을 넣고 버스을 탔다... 가 가능하단다.



그리고 통장에는 아이가 오면 언제든지 해지가 가능다고 햇다. 중구청에서는 애들 데려오면 해준다고 햇다가 애가 와서 신청서을 쓰니 승인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택시을 타고 집에 오면서 이야기을 하니 중구청장에 직인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가입할때는 언제든지 동사무소직원이 애들 데리고가면 생활이 어려울때 해지가 가능하다고 걱정하지 말고 들라고 햇다.



동사무소 직원도 처음에는 디딤씨앗통장 해지가 가능하다고 했다. 애들 데리고 오라고해서 갔더니 중구청에 전화을 하더니 서류을 써야 하고 결혼자금에 체크을 해서 학자금으로 돌리며 생활자금 카드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중구청에 전화을 하더니 안된다고 해서 통장에 기입되어있는데로 신한은행을 갔더니 해지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또 중구청는 이제는 중구청장의 직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온김에 보험을 해약하고 얼마가 몇십만원이 들어와 버스회사에 계좌이체을 하는데 사람들이 무료로 버스을 타고 계좌이체을 안해도 버스운전사는 싫은 내색이 없다.



주위을 둘러보니 노인들이 대부분 버스을 이용한다. 아마 무료인가보다 . 개인연금과 공무원 교사퇴직연금을 받는 분들은 버스표에 몇는 내야 하지 않을까



부동산이나 다른 영업파트는 꾸준히 하면 돈은 번다. 하나 가만히 보니 연금을 받는 퇴직공무원들이나 다른 분들이 여유롭게 하신다. 퇴직연금도 받으며 택시운전도 하시고 여유롭다.



기차도 보니 할인표가 교통복지로 정착이 되었는데 기차철도역무원이나 공무원의 처우개선은 어찌되어서 데모을 하는 것일까



요새 부동산 분양을 하면서 돌아다니ㅂ며 정치권에 배신감을 느끼었다.



아프리카로 다시 나간다는 UN일을 햇던 분은 가족사진을 페이스북으로 보내왔다.



부탄의 UNV로일을 했던 아트 마틴은 아들들의 교육을 어찌해야할 지 고민햇다. 30대후반이었는데 두아들과 주말에 운동장에서 축구을 하기도했다..



부탄의 전통 약초사업을 이끄는 단장은 EU 사업이었는데 자식들을 아내와 함께 호주에 유학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일을 제안할 줄 모르고있고 빚살좋은 개살구라고 합니다.


이젠 저도 너무 지쳐서 ....침묵하는 자는 아파트도 있고 사업체도있습니다. 가정교육도 제사도 필요없어서


일반 아아트에서는 제사을 지낼 공간도 사라지고 우리는 이제 아버지 어버니가 필요없다는 듯이 이야기 합니다.


어린시절에 국민학교 3학년 3월에 아버지는 여동생이 입하는 하는 날인가 좀 지나서


서울의 신림동에서 양복을 신문지에 말라서 나가며 우리을 다리에 건네고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해 보니 쌀이 없었나봅니다.


비가오는 날이어서 우산을 쓰고도 손이 시러워서 벌벌떨며 집에 왔는데


어머니가 국수을 오뎅과 계란으로만 끓여서 밥통에 넣어서 아랫목에 넣어두셨다가


제가 오니까 따스한 국수 한그룻을 건네 주었고 그후 어머니는 일을 나가시고


아버지가 없는데 신림극장에서 영화을 보여주고 우리 사진을 규칙적으로 찍었는데 아버지에게 보내셧나봅니다.


그후 아버지가 대전에 있다고 해서 방학때 대전에 동생들과 내려와서 여관에 한달을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그다음에 대전으로 왔습니다ㅣ.


대전은 아버지가 월평동 둔산동 위 육군 부대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하던 곳이기도합니다.


어려서 어머니가 우리와 같이 없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됏을까요?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이종사촌할머니가 우리 남동생들이


운동장에서 놀때 봐주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가족공동체가 허울어져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아버지제사에 놓던 은수저을 대전신세계 백화점에 가서 팔려다가 다시 가져왔습니다.



이 시대에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대전에서는 버스을 타면서 교통카드을 터치하는 대신에 계좌이체을 한다고 하면 버스운전사가 녹색카드을 건넨다. 그 카드에는 하나은행과 농협 두군데 은행계좌번호가 적혀있고 어른은 1700원 중고생은 900원 초등학생은 400원이라고 적혀 있다.



대전은 버스을 승차할때 현금을 받지 않는다. 지난 번에 약속이 있어서 전주 한옥마을에 가서 친구와 그녀의 일본친구을 만나고 오면서 버스을 승차하는데 현금도 받는다고 해서 동전을 넣고 버스을 탔다.



어제 버스교통비을 내려고 은행계좌에 돈을 넣으니 그 버스운수회사 계좌가 입금 거래가 최근에 없었다고 메세지가 떴다. 몇년인가 몇개월동안 거래가 없었다고 뜬 것이다.



가민히 생각해보니 버스을 아침에 탈 때는 젊은이들이 좀 있지만 평상시에 버스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거의 나이가 든사람이다. 대전은 65세부터인가 70세부터 버스을 타면 무료이다. 낮에 버스을 타면 젊은이을 보기가 힘이 든다.



어제 기차을 타고 서울에을 가려다 말았다. 요새는 기차도 군인이나 경로 청소년층 장애인등 할인 기차타고 출퇴근을 저렴하게 하는 일반정기권 기간자유형정기권을 이용한다.



대전과 서울을 왕복KTX을 한달간 이용한다면 일반승차권은 1042800원 인데 정기 승차권은 457600원이다.



한 이십여년전에 서울에 취직을 하고서 집을 얻지못해 두달간을 서을로 출퇴근한 적이 있다. 아침에 갈 때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첫차을 타고 서울로 가고 내려올때는 기차을 타고 내가 가지고있는 자료을 두시간정도 보면서 내려왔다.



아침에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신문을 한부을 사서 읽다가 잠을 잔다. 여름이었는데 고속버스에 에어컨이 너무 추워서 신문을 덮고 자기도 했다. 월요일에 비가 오면 버스가 연착이 된다. 한시간 정도 지방에서 집이 있는 사람들이 월요일 요전에 서울로 가거나 하면서 자동차도 더 많다.



서울의 강남에 위치한 직장에서 저녁에 퇴근하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서대전역까지 기차을 타고 내려왔다. 취재기자 생활을 하다보니 밖에 돌아다니고 하고 해서 기차에 타면 너무 추웠다. 그래서 철도공사에 제안을 했다. 기차의 에어컨 온도을 조절해 달라고 말이다.



요사이는 대전의 학교에서도 교실에어컨 온도가 18도라고 한다. 그러나 정부 에어컨 실내 권장온도는 2426도로 알고 있다. 아이들은 여름에 학교에서 춥다고 담요을 두르고 있다고 한다. 학교 시험감독 자원봉사을 갔더니 학생들이 치마에 교복바지을 입고 있고 담요을 두르고 있었다.



우리는 집에서 그당시에 에어컨을 별로 안키고 선풍기을 쐬서 아이는 냉방병에 걸리곤 했다.



25년전에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외근이 잦은 나는 월급의 대부분을 교통비로 썼다. 서울에 취직이 되고 나서 양제동에 오피스텔에 사는 여동생과 같이 살려고 가니 여동생이 싫어했다. 빨리 가라는 듯이 이야기 했다.밤 11시에 나와서 서울역에 가니 대전으로 가는 마지막기차가 떠나서 서울역 바로 옆에 빵가게인가 무슨 가게가 24시간이라 그곳에서 밤을 세우고 첫차을 타고 대전에 내려왔었다.



부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니 동생이 자기 집을 얻어달라고 했다. 막내 남동생은 누나 얼마 벌었냐며 대전 법동에 조그마한 아파트을 얻어서 나가라고 했다. UNV는 회사에서 일하는 월급장이가 아니다. 봉사차원에서 나가는 것이기에 돈이 얼마안된다.



방글라데시도 한국청년해외봉사단으로 나간것이기에 한달 생활비가 300달러가 나오고 한달 적립금이 한국정부에서 40만원인가 적립이 되었다. 방글라데시에서 해외 파견근무하는 사람들은 그당시에 월급이 200만원에서 300만원이고 회사에 따라서 집과 자동차로 차등지원된다는 소리을 들었다.



잠시 회사에서 방글라데시에 파견근무을 나온 사람과 이야기을 나오니 별 일일 아니다. 한국에서 해외운송되는 물건이 방글라데시에 잘 도착하는지 그동안 현지회사와 접촉을 하고 한국에 소식을 보내고 하면서 그냉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에 기다리는 것이다. 그 동안 다카시내의 시티투어라도 할만 한데 그들은 밖은 위험하다 고 정해진 곳이 아니면 잘 안나간다. 그당시에 한국에서 방글라데시로 출장 온 사람들은 호텔에서만 머물고 그 주위을 왔다갔다 하다 한국으로 간다고 했다.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은 봉사단이다. 난 방그라데시을 떠나기전에 어떤회사에서 방글라데시의 시골농장에서 망고을 키워 볼 생각이 없는지 구두로 질문도 받고 했다. 나는 별로 방그랄데시의 한인 사회와 접촉이 없었는데 도 말이다.



방그라데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접촉이 많았다. 아파트에 사는 다른 세단원들은 가끔씩 교류하는 이야기도 하고 교회을 왔다갔다하는 대구의 동료단원은 교회 목사아들과 다른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을 했었다.



요사이 지난 6월의 어느 엔지오에서 KOICA 사업프로젝트로 떠나는 사람이 내게 인사도 없이 그냥 페이스북으로 소식이 전해 왔다. 그 후 방글라데시에 하탈이 일었났다고 하고 한달후 소식이 없었다가 한 번 소식을 전하고 소식이 없다.



일을 그만두게 되어 잠깐 일자리을 알아보는 동안 방그라데시소식을 접하니 세이크하시나가 15년 집권을 하다가 인도로 망명하고 그라민뱅크에 무하마드 유뉴스가 권한대행으로 일을 하면서 인도에서는 3개월안에 총선을 하라고 압박을 하고 있었다.



무하마드 유뉴스는 18년전인가 이화여대을 방문해서 그라민 뱅크에 대해서 연설을 한 적이 있다.



BBC방송에 의하면 실직상태의 많은 대학생들이 공무원할당제에 반발을 해서 데모가 일어나서 국가전복상태에 놓이고 일반 사회단체는 세금안내기 운동을 벌이고



거리에는 폭동이 난무하고 인도의 자료에 의하면 공장이 불타고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8월에 방그라데시 UNDP대표사진을 보니 얼굴이 얼어 있었다. 제3세계국가에서는 국가전복사태 등의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방송국과 UN 사무국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느다. UNV레터에 의하면 어느 아프리카에서는 UN직원이 사망했다고 보도가 되기도 한다. 현지에서 UNV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보험에 든다.내가 죽으면 누구에게 사망보험금을 줄 것인지 말이다. AIG 보험이다. 수익자는 몇명이든 상관이 없이 적는다. 한국에서는 보험을 들면 수익자을 한명만 정한다.그래서 어딘가에 제안도 햇다. 보험상속자을 여러면 지정하자고 말이다. 보험법은 그대로 아직도 한명만 보험사망금을 받는다. 나는 그때 우리부모님과 세명의 동생을 지정했다. 아마 결혼을 했다면 남편을 하나 지정햇을지도 모른다. 자식과 말이다.



20여년전에 주간지 취재기자 생활을 하면서 나는 밖으로 많이 돌아다녀서 그때는 결혼을 안해서 수익자을 어머니 한 분으로 정했다. 보험담당자에게 아버지도 나중에 적겠다고 수익자지정을 여러명이 안되냐고 물어보니 본사인 알리앙스에 알아보겟다고 하고 연락이 없이 시간이 흘러갔었다.



전남편은 내가 부산에 있을때 무슨 보험증서을 보여주면서 계약자도 자신의 이름으로 수익자로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아마 나보고 수익자을 변경해달라는 말을 요구햇엇던 것 같다. 나는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이만 들었지 금융상식도 없었다.



요새 카드값때문에 이곳 저곳의 자료을 보니 소상공인공단에서는 소상공인들에게 어느 정도 자격만 주어지면 일억도 대출을 해주고 3억도 대출을 해준다. 그것도 청년들에게 말이다. 사업계획서 만으로 신용대출이 아니라 담보대출로 예전에는 이루어다. 내가 지역신문사을 할려고 알아보니 담보대출이 있어야 햇고 어머니는 집에 가게 한간도 못쓰개 했다.



예전에 서울 관악지역에서 지역지을 하시는 분이 꼐셨는데 사무실이 작고 혼자서 일을 하면서 기사도 쓰고 광고도 하시고 취재도 다니셧다.작은 사무실이었다.



나는 관악지역에 지역지취재기자로 관악구의회. 구청등 각종 사회단체 교회. 절. 심지어 원불교 절에도 가보았다. 강남구의 각지역에 종교 관련한 곳은 평일에는 닫혀 있는데 관악지역은 서울에서 가장 못싸는 동네라고 했지만 평일에는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모여서 합창을 연습하고 관악산 기의 절에는 대만등지에서 스님이 오시고 차 한잔 할 수가 있고 걷다가 힘이 들면 원불교 절에 들어가 잠시 쉰다고 하고 눕기도 했다.



물론 걸다가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프면 레스토랑에 들어가 쉬기도 한다. 한번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쉬다가 사장의 아내가 계모임이 있었는지 그 레스토랑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때 그 지역지에 사장은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자신의 과거을 이야기 하며 수습시절에는 회사에서 토큰 두개을 주고 취재하러 나가라고 했다고 이야기 했다.그분은 아침에 출근을 하면 좀 있다가 오전에 일찍 밖으로 나가라고 한다.



강남에서 일할때는 오전에 사무실청소을 먼저하고 커피잔을 닦고 책상에 앉아서 신문을 보며 전화번호을 보며 여기저기에 보도자료을 전화해서 팩스로 신청하고 밖으로 나간다. 회사사무실에서 가까운 곳을 갈때는 점심때 사무실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주로 밖에서는 힘이 들면 은행이나 자뎅커피숍에 들어가 차을 마시며 원고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협회 사무실에 들어가 커피을 마시기도 하고 서초동에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자료을 찾거나 복사도 하고 우체국 사서함에도 가고 사무실에 들어가면 밖에서 걸려오는 전화을 노트에 적어두기도 하고 사장에 전달도 했다/.



월급이 밀려서 그만두면서 얘기하니 사장은 어느 전자회사에 비서로 갈 생각은 없는지 물어왔다. 나는 굶어도 글을 쓰고 사람들의 이야기을 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 여성들을 인터뷰글을 계속 연재하자 모방송국 작가가 전화가 왔다. 다큐멘터리 작가 인데 관심이 있냐고 나는 그냥 글쓰는 것이 좋았고 그냥 말았다.



외국에 간 것도 나는 좋은 글 소재로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의회타임즈의 원고을 마감하고 그 다음날 편안한 마음에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적어 보냈다.나는 무슨일을 함에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은일을 먼저 생각을 했다. 불의을 보면 못참아서 대학시절에는 데모도 참가 햇지만 운동권은 아니다. 그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햇고 아버지는 지역에 국회의원을 지원하면서 동네지역일을 하는 이야기을 종종하셧다. 그리고 충청권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다 .내가 대학생때 데모대을 쫓아다닐 어머니는 아침에 나가는 나에게 택시비을 쥐어주었고 아버지는 버럭화을 내며 나을 힐난 했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의 생각이 바뀌고 방글라데시와 부탄을 다녀오면서 경제관련 기업관련 책을 읽으며 나의 생각은 바뀌어가고 있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투명한 것을 좋아한다. 국제기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부탄의 유학을 다녀 온 사들도 깨인사람들은 있다. 그러나 아직은 급행료가 무엇인지 젊은이들이 알았으면 한다. 제 3세계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배고프다 한달 급료을 받으면 며칠이 지나면 없다. 그래서 나중에는 사정을 알게 되어 아사드게이크에서 오전에 삼무샤가 튀겨져 나오는 시간에 그식당에 가서 삼뮤사을 사가지고 와서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사무실에 손님이 오면 나에게 따스한 밀크티인 홍자을 한잔씩 건네주었다. 헤드말리인 사나훌라가 집으로 초대해 자신의 가족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햇다. 그리고 자신의 열다섯살인가하는 아들을 인사시키며 자랑스러워했다. 잠시 그의 침대을 내어주며 쉬라고 하고 차인가 식사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등이 가려워서 고생을 했다.



그리고 다른 말리가 집으로 초대햇다 아이들이 올망졸망햇다. 그지역의아이들과 부녀자들 피부병이 있는사람들 소독을 해주고 약을 발라주고 하니 그 말리가 정기적으로 초대을 햇다. 그 아이들에게 다카의 뉴마에 가서 크레파스을 사다주기도 하고 동화책을 사다주기도 했다. 방글라데시는 동화책이 발달을 안했다.



나중에 부탄에 가니 유니세프에서 학용품도 팔고 그나라 전래동화책을 만드는 사업도 하고 구연동화작가을 외국에서 초대해서 구연동화을 아이들에게 들여주고 하는등 갖가지 사업을 했다.



나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내돈을 많이 쓰고 다녔다. 남동생이 돈을 얼마나 모았냐는 말에 어이가 없었고 여동생이 내가 방그라데시을 다녀오고 부탄을 다녀 왔을 때도 도움을 요청해서 너무 황당했다. 부탄을 다녀온 후 서울에 집을 얻고 서울에 내가 가서 살려고 하니 동생은 싫어해서 서울임업연구원을 다니다가 대전에 내려왔다. 다른 파트에서 나무의 화분시기을 조사하는 프로젝트에 같이 일하자고 해서 그러겟다고 이야기하고 당시 상사에게 이야기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 당시에 사무실에 충남대 나온 선배들과 충청도 사람들이 왔다 갔다.



&39



시간이 지나고 보니 여동생이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흘러들었다. 난 방그라데시아카데미에게 방글라어을 배웠는데 그때 당시에 중국에 신화통신기자인가가 무자디드 사헵에게서 방글라언어을 배운다고 이야기을 들었고 한번 얼핏보기도했다.



그리고 내가 방그라데시에 있을때 2년계약이 끝나갈때 여동생이 일본으로 어학연수을 간다는 이야기을 얼핏 햇었던 것 같고 내가 방그라데시을 다녀왔을때 을지외국어출판사에 다니면 일본어책을 만들기도 한다고 하고 사장은 나이가 있어도 젊은 사람들의 노래을 잘 부른다고 이야기 하고 기차에서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고 하고...



자꾸 내가 서울에가면 멀리 했다. 내가 아이을 낳고 대전에서 애을 키우며 알바을 일년이상을 애들 사진찍는 것을 했다. 서울에 연기모델학원소속으로 애들사진을 찍어서 모델이나 연기자에 관심있는지 물어보고 학원수강을 소개하는 것이었다.그곳에서 딸을 연기학원에 보내라고 했다. 그냥 교육시켜주겠다고 학원에 같이 와서 애을 맡기고 현장에 나가서 애들 사진을 찍으면 된다고 말이다.애을 밖에 얼굴 팔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우리 어머니도 나에게 큰소리 치고 하셨지만 밖에 얼굴팔리는 것을 안좋아해서 대학시절에 아르바이트 대신에 집안일을 하라고하셧다. 처음에 대학을 입학하고서 6시안에 집에 들어와서 저녁상을 어머니을 도와서 차리고 주말이면 세탁기 돌리고 밥상을 차리면 설겆이 하고 엄마가 동전을 몇개주면 그 것을 타서 태평시장을 건너서 112번을 타고 충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가서 공부을 하다가 다시 저녁되기전에 집에와서 저녁을 차리고 자곤 했다.



딸이 자꾸 아르바이트을 한다고 해서 그러지 말고 영어와 한자공부을 하고 내일 배움카드로 컴튜터 활용과정을 수강하라고 했다. 식당에서 알바을 시작하면 너는 노동자가 되지만 컴활을 따고 하면 사무직이 되고 판매직을 할 수있다.



공산국가가 노동자을 우선시 한다고 하지만 방글라데시에서 노동자들이 입는 옷과 사무직이 입는 옷은 다르고 대우도 달랐다. 물론 한국도 자동차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숙련공의 연봉이 일억이 넘고 사무직으로 들어갔다가 기술직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고 어머니는 말씀 하시지만 나는 외국으로 나갈 생각에 배우자 보는 눈이 다른데 자꾸만 엉또당치 않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기분이 상했다.



전넘편을 만났을때도 처음에 말이 너무 많고 한곳에 오래 앉아서 이야기을 안하고 자꾸 자리을 바꾸어 가며 일을하고 해서 어머니에게 싫어서 안만나다고 햇더니



나이가 어리니 늦게 까지 돈을 벌어서 너을 먹여살릴것이고 아버지는 말이 없어서 답답하고 무뚝뚝해서 재미가 없지만 애아빠는 말도 잘하고 하니 심심하지 않을 것이고 나이가 차이가 안 나서서 좋은 점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더니 내가 두번째만나러갔을 때 남자친구을 만나러 나간다고 하니 아 나오셔서 남자친구을 만났다. 그러더니 여동생에게 조사을 시켯다고 못만나게 하고 남자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안동에서 한시인가 보기로 햇다고 하니 차비을 한시가 다 넘어서 만원한장을 주었다.



나는 그동안에 정부기관에 수많은 제안을 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부탄에 다녀온 후 부터 서울에서 취재 활동을 하면서도 피시방에 가서 서울시청 및중앙정부부서에 제안도 하고 꾸준히 했다. 대전시청에도 했다.



그러나 아무에개도 이야기을 안하고 있었고 내가 세계식량농업기구와 국제식량농업기구에 후보자로 올라있는 것도 아무에게 이야기을 안했었다.



나는 나의 이익에 앞서 항상 국익과 정부단제의 이익과 기업에 아이디어을 제안하면서 다 잘되기을 바랬다.



그러나 나의 동생들은 다른 것 같다. 부탄에 다녀오니 돈을 얼마 벌어왔냐고 이야기하고 말이다. 어머니는 돈을 여동생에게 주어서 집을 얻으라고 이야기 하고 매주 여동생이 토요일 만다 대전집에 내려오다가 안내려왔다.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신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어머니 역활을 안하시고 나에게 모두 미룬것은 아닌지딸이 수능을 공부할때도 지난 봄까지만해도 대학 등록금을 동생과 조카들에게 이야기해서 받아서 주신다고 했다가 지금은 뒷자리로 물러나셨다.



남동생의 딸과 아들을 돌볼때는 낮에는 어머니가 안볼보다가 저녁을 먹고 나면 그때 와서 문제집을 같이 보기 도했다. 처음에는 내가 그림일기의 그림그리고 글씨쓰는 것을 일일이 하나하나 교정을 했었다. 큰 남동생이 초일때 왔을때 글씨가 엉망이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교정을 보고 다시 쓰게 하고 하면서 변한 것이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서 앨비 노트북을 샀다. 15년전인가 그당시에 할인가로 70만뭔을 주고 샀는데 조카가 자기 공부한다고 가지고 갔다. 그 노트북을 들고 경주인가 큰 외삼촌집에 제사에 참석한다고 갔었다. 자기 엄마가 가자고 했단다. 이혼을 한 줄 알았더니 태평중학교 근처로 이사올 때 쯤에 알았다. 별거중이었단다.그때쯤에 올캐가 이혼소장을 제출했다고 남동생이 술이 삐뚤어지고 먹고 걷지도 못하고 지금 이근처의 맥주집에서 연락이 와서 어머니와 같이 와서 데리고 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올캐아닌 올캐도 나에게 애들 돌봐주었다고 사래금을 준적이 없엇고 남동생도 나에게 용돈을 준적이 없었다. 중촌동에 아파트도 올캐가 나가면서 어지려다고 어머니가 치우고 신협에 돈을 안내서 어머니가 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만 다. 그네 부부들은 애들이 아프다면 우리집에 데려다 두었다가 병이 다 낳으면 데려가고 애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주말이면 집에 대려다두고 일요일 저녁이나 되면 중촌동 아파트로 데려갔다..그러나 집에 오면서 무엇인가을 사가지고오는 인사치레가 없었다.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데려갔었다. 간식도 내돈 들여 해주고 밀가루사가지고 와서 해주고...아니면 어머니가 사다 놓은 라면을 끓여 간식으로 주고 그 애들은 밥을 잘먹어서 라면은 식사가 아니라 간식으로 새참으로 세시경에 먹었다. 그애들이 중촌동에 살때 어린이집에 두시경에 끝나서 올캐가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집에 두시반경에 애들을 데려다 두었고 무슨일인지 어머니도 아버지도 낮에 집에 없으셧다. 내가 돌봐야 하는 입장이 되고 어머니는 당연시 여겼다. 애들 돌본는제 올캐는 과자 한번 안사가지고 왔고 내돈이 들어갔고 어머니에 의하면 올캐도 아파트에 살면서 행실이 안좋아졌다고 이야기하고 올캐가 자기가 아파트에 더 살면 어게 될지 그 아파트에 에서 빨리 나오겟다고 이야기을 했다고 한다. 불미스러운일이 있어도 남동생이 못나서 그러니 눈 감고 있다고도 했다.



지난주에는 막내 남동생의 이야기을 듣다가 화을 내고 딸을 데리고 나왔다. 딸은 잘 모른다. 딸은 그냥 아무소리도 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 큰 남동생의 큰딸이 결혼을 할때 혼주자리에 올캐가 앉았다. 나는 그 뒷자리에서 어머니와 결혼식을 보는데 왠지 눈물이 나와서 눈을 훔다. 그부부들은 결혼식장을 은 우리 어머니와 나을 뒤로하고 큰 조가 딸인 한해도 외가집사람들이 혼주역활을 했다.



어머니는 큰 남동생이 자기 딸 결혼을 앞두고 올캐을 만나고 다니며 하자 몸져 누어셨다. 왜 올캐는 인사을 드리려 오지 않냐고 남동생이 나쁘다고 .애들이 한참 손이 가고 돌보아야 할때는 밖으로 나돌더니 다 크니까 지들끼리 가족이라고 하면서..



결혼식을 앞두고 올캐가 왔다. 그냥 허접하게 옷을 입고 와서 오래간만에 만나면서 왜 어머니와 따로 사냐고 첫마디가 그랫다. 딸을 돌봐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 아니라 말이다. 요즘에 돈이 궁해서 전화와 메세지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니 아무 대답이 없엇다.



애을 돌보는데 한시간에 얼마인가 법원에 고소해서 돈을 받아낼까 생각을 했다.. 예전에 어머니 말에 의하면 술집을 하면서 아가씨들에게 월급을 준다고 그리고 애들교육을 안하고 애들이 저녁에 밖으로 돌아서 거지 같아서 애들을 데려온다고 초등학교이학년인가 일학년때 데리고 와서 학교을 보내고 애들 학교 다녀오면 내가 돌보고 했다..



그때 이미 막내 남동생의 딸도 보고 있었다. 애가 초등학교을 가야 하는데 그 외갓집에서 안봐서 언젠가 트럭에 애을 데리고 와서 우리가 받았다. 그집에는 그 올케에게 세명의 남동생이 있었고 그 동생들이 막내남동생을 잘 따른다고 햇다. 용돈도 주고 한다고 나중에 들으니 막내가 배재대에 궁도 선수을 한다는 이야기을 들었다. ]



그애들은 남동생이 고3무렵에 요식업에서 알바을 하는데 십대였던 올캐가 남동생에게 붙어서 안떨어질려고 했단다. 서울에서 직장 쌩활을 하다가 대전에 내려왔는데 울상이 되서 방안에서 그 여자애와 앉아서 이야기을 하고 나중에는 친구가 대학에 간다고 나도 대학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을 햇다. 그 여자애는 입술이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앉아있엇다. 나는 그렇게 빨간 립스틱을 발라본적이 없었다. 그애의 아버지가 건설일을 하는 전기업자인데 지금생각해보지 유치권 행사가 종종 는데 ...



그리고 나는 다른 잡지사에서 일하다 한국청년해외봉사단으로 방글라데시을 나가고 남동생은 그 여자애을 두고 군대을 갔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임신을 해서 아이을 낳아서 어머니가 큰 남동생의 여자애와 막내남동생의 여자애가 둘이 다 애을 낳아서 그동안 고생한것을 이야기 해서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돌아와서 많이 울었다.



가정교육을 중요하다며 한겨울에 거실에 난로을 피우는데 팬티을 그 가운데 널어둔것 부터 해서 애들을 키우는 이야기 작은 어머니댁에 고종사촌이 우리집에 와서 머물며 한 행동. 우리가 힘이 들었는데 그 아이만 작은 어머니가 불러내서 고기을 사주더란이야기며..그러니 내가 대학원을 포기하고 어머니 말대로 큰 남동생의 결혼식을 추진해서 그 다음달에 어머니는 손자을 안았다 그리고 서울에 여동생과 살 집도 마련했다. 어머니는 내가 내자식이 있는데도 자기을 위해서 일해주기을 바라셧다. 어미니가 나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했는가



조카들은 나에게 큰절을 올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그러나 더 이상의 희생을 없을 것이다. 코바에서도 이사장이 전화을 하다가 뜸해다가 며칠전에 전화해서 바빴다고 했다.모임에 나와라고 해서 이번에 정장을 준비하려고 햇는데 대전 백화점에는 8899사이즈 비시니스 슈트나 원피스 부인네 정장이 없다. 50대들이면 사회이 정상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거나 중견간부들이다.



딸은 내 조카들이나 동생들이 어떻게 이야기햇는지 내가 외국에 나가 경력을 쌓아서 이나이라면 가정부을 두고 운전사을 두고 여러영 거닐고서 일을 하는 비지니스 대표가 되었을껏이라고 이야기을 했더니 헛소리 하지 마란다. 나보고 정신병 이나냐 치매가 아니냐 해서 요새 의욕이 떨어졌다.



그래서 힘이 들어서 다시 일어나야지 하며 몸이 안좋아서 부동산 분양일을 하면 대전의 도안지역에 KCC 에테르스위첸에 다녔다. 때로는 택시을 타고 아침에 버스을 타고 가서 스타벅스에 앉아서 목원대 사거리에 유동인구도 파악하고 라도무스아트센타 사거리에도 가보고 아침에 쌀쌀하다. 따스한 커피 한잔을 들고 한잠을 걷다보면 용계동 스위첸 모델하우스가 나온다. 오픈 한지 꽤 되어서 인가 아짐에 교육이 없이 회의만 하고 나가란다. 목원대는 충남대와 비교하니 조경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그주위에 홍보지을 전하고 대전서구 용문역 에테르스위첸현장에도 저녁에 가서 홍보지을 그 주위에 전달하고 낮에도 롯데 뒷편으로 603번다니는 곳까지 전단지을 뿌리고 . 대전에 유천동 태평시장. 둔산동 월평동까지 팀장 박지만 이름과 오도경씨 이름으로 갤러리아백화점 . 선화동에 엔시 백화점등에 문창동. 대흥동 . 중앙시장등에 홍보지을 나누주며 경도나비엔직원과 이야기하다가 석유이동식순간 온수기을 개발하자고 보일러 회사에 제안했다. 야영을 하기에는 딱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어려서 부터 석유난로가 있었고 조카들 세명과 같이 살때는 석유귀뚜라미 보일러에 겨울을 앞두고 석유 한차을 불러서 보일러통에 석유을 넣은 것이 일이었다. 저녁에 잠시. 아침에 잠시 보일러을 켜서 아이들이 세수하게 하고 저녁에는 설겆이 등 조금만 보일러을 돌렸다. 물을 빼면 방이 안따슷하다.



겨울에 탠트에서 생활하는 난민촌의 사람들이나 중도지역 방그라데시의 시골 도시의 뱀부집에 사는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이 따스한 물을 쓰고 여자들도 위생관념이 생기어 잘 뒷물등을 했으면 한다.방글라데시에는 목욕탕이나 샤워을 할 수있는 시설이 돈을 내고 하는 곳이 생기었으면 한다.



이동식 석유순간온수기을 만들면 아프리카나 중동아시아. 서남아시아 등 전세계에서 따스한 물로 세수하는 어린이와 여성들의 성병이 줄어들것이다.



이런생각을 하면서 부동산 분양을 하면 업체을 방문하는데 왠지들 불청객대하는 분들도 계신다. 롯데캐슬을 분양하면 안하겟다고 햇고 분양안내서도 안받았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태평동에 유등천가 저쪽으로 롯데건설측에서 들어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에테르스위첸사무소을 옮긴다 해서 가보니 대전동구 가오동 퍼파기 하는 롯덴캐슬 분양 사무소였다. 안한다고하고 에테르스위첸 홍보을하는데 팀장이 롯데캐슬 홍보을 하라고 해서 몇장만 돌리고 롯데캣슬 홍보용 화장지을 중국집와 모임공간국보 원동인가 새마을 금고 직물회사등에 나누어주었다.



요사이 여러곳을 다니면 카드을 못쓰게 되어서 버스을 그냥 타고 다니며 계좌이체 녹색종이 카드을 받았다 .카드빚은 독촉이고 삼성카드는 분명히 가게에 5개월 6개월 할부로 끊었는데 엄청나게 나오고 코바 모임은 12월 14일 하는데 예산부족으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난 가방도 사고 정장 바지도 사고 구두도 샀다. 해외봉사단의밤을 가니 젊은KOICA 귀국단원들은 예쁘게 원피스 정장에 구두을 신고 참석했다. 나는 그냥 편하게 바지와 티셔츠와 잠바쿄트였다.그래도 강순이사무차장은 나을 알아보고 부천에 카톨릭대 교수을 소개 해주었다. 방글라데시에 나갔다온 후배라며 .. 그후 방글라데시 모임을 하자고 문자을 보내니 답변이 없었다. 방글라데시 파견 25주년을 기념해서 모이자고 코바사무실에 부탁해 이메일을 부탁했었다. 아무 연락이 없었다. 방글라데시 파견 20주년 모임은 내가 유방암 증세가 있다고 정밀검사을 받으라는 유천동에 세종산부인과 의사에 소견서을 가지고 카톨릭 병원을 다니며 수원역 앞의 딜리데바에 우리 방그라데시 같은 기수을 만나고 부터다. 내가 일일이 전화을 다 해서 시간을 조율해서 코바4기가 대구에 고운주만 불참하고 다 모여서 남자라고 류덕호씨가 식사값을 다냈다.



지난 10월에 방글라데시 사태을 이야기하러 전주에 5기 김영주을 만나러 갔는데 류덕호씨도 온다고 해서 같이 만났지만 사는 것이 다들 힘들어 해서 말도 못하고 왔다.



류덕호씨가 찻값을 냈다. 자신은 요새 태양열발전기 사업을 한다고 햇다. 같은 기수인 다른 최정실에게 이야기 햇더니 아마 아내 몰래 돈을 꼬불쳐놓았다가 그돈으로 커피값을 냈을 것이라며 쯧쯧 거렸다.나도 내가 살기 힘이드는데 누굴생각해/.하며 방그라일을 접기로 햇다.



부동산 분양일을 하면서 다른 엔지오의 보고서을 보며 코바에는 KOICA에서 예산을 안주는데 어떤 엔지오에 결산보고서을 보니 억단위로 KOICA애서 예산이 주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방글라데시에 첫파견기수로 일하면서 일을 하려고해도 KOICA에서 예산이 없어서 일을 못하고 한사람에게만 프로젝트사업으로 코디네이터가 지원을 해주어서 불만을 단원들이 내고 참고있는에 방글라데시에 다른 기독교 단체 앤지오에 KOICA에서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해서 단원들이 들고 일어날 기세엿다. 사태는 진정이 되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나섬회일을 하는데 후배가 소식을 전해왔다. 한국해외봉사단원들 모두에게 일정하게 KOICA 사무소애서 예산을 주어서 일을 작은 프로젝트을 하게 되었다는 편지 였다.



최근에 KOICA애서 답장이 왔다. 한국해외봉사단 에 다년간 파견되어서 일하는 분들의 자녀 장학금과 아파트 청약 가산점등을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할 수없다는 내용이었다.



딸이 대학원서을 내서 장학금을 알아보니 선교사 자녀에게 선교사 장학금이 주어지고 유엔참전국 후손에게 유엔장학금이 주어지고 있었다.



한 20년전에 대학원을 피시방에서 알아보면서 서울대을 보니 UN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UN장학금이 지원되고 있었다. 지방대에서는 유엔에서 장학금 혜택이 없었다.



그래도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다시 제안을 했다 국제기구에 접속햇다가 방글라에이드에서 지난 78월에 총상을 입은 사람을 돕는 의약품등 원조가 필요한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해에 보이스카우트연맹 칠백명이 다녀갔으니 들과 연계 해야한다는 생각에 몇자을 대전유성구의회에 올렸다. 어재 저녁에 보니 삭제 되었다.



중기이코노미 지원단에서 연락이 왔다.서울 강남구 패션협회빌딩에서 법인영업교육이 있다고 한데 현대카드 마감이 오후두시가 돈을 안넣으면 어딴 해가 갈지 모른다. 서울을 기차을 타고 가다가 내려왔다. 신한은행에가니 디딤씨앗통장도 해지가 가능하고 대전중구청에 가서 레터을 지금 가려오란다. 그럼 오늘 해지 가 가능하단다.



그리고 통장에는 아이가 오면 언제든지 해지가 가능다고 햇다. 중구청에서는 애들 데려오면 해준다고 햇다가 애가 와서 신청서을 쓰니 승인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택시을 타고 집에 오면서 이야기을 하니 중구청장에 직인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가입할때는 언제든지 동사무소직원이 애들 데리고가면 생활이 어려울때 해지가 가능하다고 걱정하지 말고 들라고 햇다.



동사무소 직원도 처음에는 디딤씨앗통장 해지가 가능하다고 했다. 애들 데리고 오라고해서 갔더니 중구청에 전화을 하더니 서류을 써야 하고 결혼자금에 체크을 해서 학자금으로 돌리며 생활자금 카드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중구청에 전화을 하더니 안된다고 해서 통장에 기입되어있는데로 신한은행을 갔더니 해지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또 중구청는 이제는 중구청장의 직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온김에 보험을 해약하고 얼마가 몇십만원이 들어와 버스회사에 계좌이체을 하는데 사람들이 무료로 버스을 타고 계좌이체을 안해도 버스운전사는 싫은 내색이 없다.



주위을 둘러보니 노인들이 대부분 버스을 이용한다. 아마 무료인가보다 . 개인연금과 공무원 교사퇴직연금을 받는 분들은 버스표에 몇는 내야 하지 않을까



부동산이나 다른 영업파트는 꾸준히 하면 돈은 번다. 하나 가만히 보니 연금을 받는 퇴직공무원들이나 다른 분들이 여유롭게 하신다. 퇴직연금도 받으며 택시운전도 하시고 여유롭다.



기차도 보니 할인표가 교통복지로 정착이 되었는데 기차철도역무원이나 공무원의 처우개선은 어찌되어서 데모을 하는 것일까



요새 부동산 분양을 하면서 돌아다니ㅂ며 정치권에 배신감을 느끼었다.



아프리카로 다시 나간다는 UN일을 햇던 분은 가족사진을 페이스북으로 보내왔다.



부탄의 UNV로일을 했던 아트 마틴은 아들들의 교육을 어찌해야할 지 고민햇다. 30대후반이었는데 두아들과 주말에 운동장에서 축구을 하기도했다..



부탄의 전통 약초사업을 이끄는 단장은 EU 사업이었는데 자식들을 아내와 함께 호주에 유학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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