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이녁에서 여보로
“진아!”하고 아버지의 부르심에 잠시 뜸을 들인다. 아니다 다를까 내가 아니고 아니라 어머니를 부른 것이다. 어릴 땐 어머니 이름이 ‘진아’인가보다 여겼다. 맏이도 아니고 막내도 아니고 일곱 번째인데 내 이름 字가 어떻게 어머니 호칭으로 굳었는지~. 누나들 이야기로는 내가 막내라 여기어 그리 되었다 한다. 아버지는 특히 날 귀여워하여 잠자리에서는 꼭 안아주었고 담배 냄새가 베인 아비지 체취가 기억이 난다. 귀엽고 예쁘게 생겨 어머니나 누나는 외출 때 마다 나를 데리고 다닐 정도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그런데 당신들의 열정이 대단하였던지 동생 둘을 더 낳았다. 그래도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도 어머니는 ‘진아’였다. ‘진아’는 친근감 있게 부를 때만 사용된 듯하다. 아버지는 남들 있을 때는 ‘이녁’으로 불렀다.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젊잖아 보였나 보다. 나중에 한자를 배우고서 호적초본 母란의 趙粉時(조분시)란 이름을 익히게 되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뭔 의미로 지었는지, 남이 부르기엔 참 어색한 이름이지만.
어머니는 딱히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 없었다. 가까이에서는 ‘보소‘로 불렀고 조금 떨어져 있을라치면 말꼬리를 길게 올리며 ’야~.‘하고 불렀다. 속정 깊은 두 분이었기에 애틋한 호칭도 있었겠지만 무심코 흘려들어 내 기억에는 없다. 두 분의 호칭은 아들딸 다 결혼시키고 일흔이 넘어서면서 여보, 당신으로 바뀌었다. TV 드라마를 보며 배운 듯하다. 난 어머니를 이녁으로 부르는 게 듣기 좋았는데~. 참, 어머니의 줄기찬 출산은 혁명 정부가 산아제한을 강력히 시행하자 보건소에서 루프 시술을 받고서야 끝이 났다.
동갑에 대학 동창인 아들 며느리는 연애 시절에 서로 이름을 불렀었다. 결혼후에 처음부터 여보, 당신으로 부르라 가르쳤지만 그게 잘 안되나 보다. 여태 아들은 이름으로 부르고 며느리는 ‘자기’란 호칭을 쓴다. 가끔은 손자가 “할머니, 엄마가 아빠보고 ‘재훈아!’라고 불렀어요.” 하고 이른다. 손자가 역할 놀이하면서 “여보~”하는 것으로 보아 늘 그렇지는 않나 보다. 딸은 학교 선배로 만난 사위에게 늘 ‘오빠’라 부르고 사위는 역시 이름을 부른다. 아무려면 어때, 자기든 오빠든 잘만 살아라. 보스턴에 몇 년째 따로 떨어져 있으니 호칭 변화도 어렵겠지.
나는 아내를 여보 당신으로 주로 부르지만, 때론 이름을 즐겨 불렀다. 아내이름은 예전에 전화번호부의 가장 많은 페이지에 수록된 ‘김정숙’이다. 술이 거나하거나 기분이 좋으면 “숙아!”또는 “정숙아!” 하고 큰 소리로 부르고 모르는 이 앞에서는 “김정숙씨~”하였다. 종종 큰 소리로 부르니 주변에 아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 자연히 친구들도 아내를 부를 땐 “정숙씨!‘다. 이름으로 불리다보니 지인 사이엔 ’우리 정숙씨.‘가 단연 인기다. 언제나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냐고? 싸울 때는 피차 온갖 호칭이 다 나온다. 욕설만 빼고.
여보 당신, 지극히 보편화된 호칭이지만 그렇지 못한 부부도 있었다. 삼십 년 전 일이다. 친구네와 통영 추도에 여름휴가를 간 적이 있다. 그 친구 막둥이가 여섯 살이었는데 제 엄마한테 “엄마도 아줌마처럼 ‘여보’하고 불러봐.”하더란다. 아마도 우리 부부의 호칭이 꼬마 녀석이 듣기에 색달라 좋았나 보다. 그 사람들은 당시에 어찌 불렀냐고? 늦둥이 이름으로 서로 불렀다. 아무개 엄마, 아무개 아빠 하고. 지금도 친구 부부의 호칭은 변함없다. 남편은 쑥스러워 아내는 부끄러워 여보 당신으로 못 부르겠단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호칭이 중요하다. 거부감 없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평생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직함이 있기에 “OO님”하고 불렀으니 불편이 없었다. 최근 파크골프장에서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데 다들 은퇴하였고 처음 대면이라 예전의 직함도 모르니 부르기가 마땅찮다. ‘어르신’은 나 또한 싫어하니 피하고 말투나 행동을 살피어 사장님, 선생님으로 호칭한다. 서구(西歐)처럼 먼저 통성명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서로 성씨나 애칭으로 부르면 어떨까. 시부모를 애칭으로 부르고 대통령을 OO씨하고 불러도 전혀 비아냥거리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 문화처럼.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다. “동방예의지국”이니 반만년이 한 번 더 지나도 안 될 말이다.
그나저나 저세상의 ‘이녁’과 ‘보소’는 극락왕생(極樂往生)하여 여보 당신 하며 알콩달콩 사랑 나누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