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사연들
어릴 적, 골목 안 우리 집은 이웃에서 자식농사 잘 지었다고 늘 칭찬이 자자했다. 6남3녀를 기르신 부모님은 비록 가난하게 살았어도 남을 속이거나 해치지 않도록 가르쳤고 성실과 근면을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만나 결혼한 아버지 어머니는 해방이후 귀국하여 전쟁과 기아를 고스란히 맨몸으로 이겨내고 혁명과 재건의 소용돌이에서 집안을 근사하며 아이들 교육 뒷바라지를 하였다. 다들 장성하여 취업하고 결혼하여 명절날 고향집에 내려오노라면 바리바리 들고 오는 선물꾸러미에 온 동네가 떠들썩하였고 아버지는 이웃들의 부러움에 으쓱하였다. 일흔 넘기어 큰아들 권유로 서울로 이사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알콩달콩 정겹게 병치레 없이 지내다가 1995년 초겨울에 여든둘로 생을 마쳤다. 어머니도 아흔하나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시절 노인으로서는 장수한 것이다. 형제남매들도 하나같이 부모 닮아 건강하여 오래오래 누리고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 목숨은 하늘 뜻에 달렸다더니 갑작스레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났다.
큰형님의 사고 소식을 접한 것은 2000년 1월2일이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봉직한 형님은 유난히도 산을 좋아하였다. 국내의 산은 모조리 섭렵하였고 일본과 동남아의 유명산에 원정도 하였고 멀리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를 다녀올 만큼 열성이었다. 특히 등산로 아닌 곳을 가로질러 다니는 모험을 즐겨서 형제들이 위험하다고 고언하면 언제 죽어도 산에서 죽으면 행복하겠다고 하였다. 소속기관의 산악회장을 맡고 있던 형님은 99년 12월말에 정년퇴직 기념으로 남미 안데스산맥의 최고봉 아콩카과(6,960m)로 원정을 떠났다. 아시아 지역 외에 최고봉이지만 여름에는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 기후라 방심하였는지 준비가 소홀한 듯 했다. 갑작스런 악천후로 다른 나라 등산객들은 하산하는데도 모처럼 기회가 아깝다며 대원들을 남겨두고 홀로 정상으로 향했다 한다. 이튿날 남은 대원의 조난 신고로 구조대가 수색을 한 끝에 정상에서 탈진하여 앉은 체 동사한 형님을 발견하였다. 산에서 생을 마감하여 행복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시신을 운구하여 귀국하는 데에 보름의 시간과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그 사건은 당시 국내 산악인들에게 무리한 산행에 대한 경고로 받아져 한동안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더 어처구니없는 이별은 큰 누님의 경우다. 늙어서 나다니면 젊은이들이 앞에서는 추어주어도 뒤로는 흉본다며 이십여 년을 다니시던 수영장을 그만두었다. 담 너머로 살며 평생 자매 같던 이웃 친구 분과 절교하였는데 그 이유도 별스럽다. 과부로 오래 살아서 무시한단다. 그러더니 옛날 힘들던 시절 사귀었던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이름도 잊고 살던 먼 외가 친지들을 찾아 만나곤 하였다. 그러다가 조카와 동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삼십년을 고이 모셔오던 자형의 무덤을 파묘하고 앞으로 제사마저 안 지내도록 했다. 자식들에게 부담 주는 게 싫다고.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작심한 듯 식음을 멀리하더니 심신이 쇠약해졌다. 몇 차례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병은 없고 본인의 의지로 삶을 거부하니 의사도 할 노릇이 없었다. 결국 석 달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여든 둘의 나이에도 아주 건강하였는데 더 쓰고 더 즐길 수 있는데 왜 그리 황급히 떠났는지. 주택 외에도 10억 원 넘는 예금을 남겼으니 더욱 모를 일이다. 벌써 7년 전의 일이지만 형제남매들 모일 때 마다 안타까워한다.
지난 3월 중순에는 시골의 둘째 형님이 떠났다. 올해 팔순을 앞두고 다 모여서 밥이나 먹자고 했는데 형제들을 주검으로 맞았다. 몇 해 전 지병인 경동맥경화를 치료하기 위하여 다니던 대학 병원에 입원하였었다. 시술 전 혈관 촬영을 위하여 조영제를 투여 하였는데 약물 쇼크로 혼절하여 생사를 헤매다 사흘 만에 회생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병원에서는 마취가 필요한 시술이나 수술은 사실상 기피하고 약물 치료만 하였다. 지난 2월에 갑자기 쓰러져 119에 실려 응급실을 다녀온 적이 있다. 여기 저기 혈관이 좁아져 생긴 일이다. 인근에 사는 동생들이 위문차 가니 10년만 더 살고 싶다 하더란다. 삶에 대한 애착과는 다르게 그날 오후 또 병원에 실려갔다하고 보름을 입원하다가 불귀의 객 이 된 것이다.
예순, 여든둘, 여든에 유명을 달리한 세 사람은 부모님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떠났으니 이 역시 불효이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했지. 학창시절부터 평생 친구가 셋 있었는데 모두가 수년 전에 떠나는 등 동창생들 열에 셋은 산에 누워 있다. 입버릇처럼 88세까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가고 싶은데 가고, 하고 싶은 것 하고 살랴했다. 건강을 자부하며 ‘잘하면 백세?’ 하고 꿈꾸었는데 형님 누님 떠남을 보니 부질없는 욕심인 듯하다. 남은 삶의 설계를 다시하리다. 얼마나 더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건강을 자랑할 게 아니라 아내에게 자식에게 부담주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단으로 삼아야지. 그 순간을 언제 맞아도 아깝지 않도록 준비하자. 그렇지만 그날이 내일은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