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여행지는?
여행, 많이도 다녔다. 전국을 자동차로 누비고 이름난 섬들을 찾았으며 지구촌 6대륙 웬만한 나라는 다 다녀왔다. 숱한 기억들은 언젠가 다리아파 못 갈 때 펼쳐볼 요량으로 외장 하드디스크에 차곡차곡 쟁여있다. 여행 기록을 뒤적이다 보면 그곳에서 뭘 했는지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곳도 더러 있지만 꼭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도 있다. 국내는 벗들과 두어 번 다닌 곳이 더러 있지만 해외는 생각만 있었지 갔던 곳을 다시 가기는 힘들었다. 매스컴에서는 새로이 각광받는 여행지 정보가 쏟아진다. 걷고 싶고, 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 욕구는 끝없어 늘 여행 정보를 검색하고 일정을 챙겨보며 가슴 두근거린다. 다음에, 그다음에 가고 싶은 곳들을 메모하다가 마지막 여행지는 어딜까 상상해 본다.
산등성이 까지, 까마득하게 봉긋한 봉분이 줄지어 있다. 마치 제식훈련을 하듯 오와 열을 맞추어서. 하나하나의 너비는 대개 한 평 남짓이고 높이는 허리춤이다. 각기 하나씩 세워진 반들반들한 비석에 본관과 이름, 측면에는 태어난 날짜와 세상을 떠난 날짜가 후면에는 애지중지 키운 자식과 자부, 손주들의 이름이 가지런히 새겨져 있다. 각각의 봉분은 제각각 숱한 사연들을 안고 있을 것이다. 소망, 슬픔, 분노, 인내, 욕망, 참과 거짓, 미움과 화해, 사랑, 역경, 실패와 성공, 환희, 성취, 감동... 온갖 것이 난 날과 떠난 날 사이의 삶에 녹아있다. 새겨진 두 줄 간의 세월이 길기도 하고 아주 짧기도 하다. 돈과 명예를 누리고 살았던 힘들고 지쳐서 겨우 살아내었던 두 줄의 기간에 함축되어 있다.
십 년 후? 이십 년 후? 언젠가 내가 가야 할 마지막 여행지이다. 나이 들어서 길 떠나면 힘들 테니 가방은 가볍게 하자. 웬만한 것은 미리 버리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여행 기록은 미리 지우자. 외롭더라도 길동무 청하지 말고 혼자서 떠나자. 아내도 친구도 하늘이 정해준 날이 따로 있다. 오로지 마지막 여행지에서 누릴 고요와 평안만을 생각하자. 시간이 멈춘 곳이지만 계절마다 산하의 색깔은 바뀌겠지. 반듯이 누워서 창공을 바라보며 땅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자. 잘 다녀왔기에 되돌아볼 일은 없을 거야. 멋진 여행지의 추억을 나란히 자리한 이웃에 자랑도 하자.
세월보다 풍습이 먼저 바뀌었다. 먼저 떠난 누님과 형님이 간 곳을 살펴보니 내가 상상하는 공원묘지는 탐욕이다. 비좁은 땅을 핑계로 매장 문화가 사라지고 82%가 화장이란다. 우리 부모님 보낼 무렵에는 화장(火葬)은 병사자(病死者)나 무연고자, 행려병자 등의 장례로 알았었는데. 감히 무덤을 상상하다니, 언감생심 조상님들 누린 복을 넘겨보았구나. 화장이 대세라니 마지막 여행은 아주 힘들겠다. 육신은 화로에서 1시간 20분 태워져 사라진다. 집게로 뼛조각을 추슬러서 분쇄기에 넣으면 순식간에 한 줌 가루로 변하겠지. 뼛가루를 탈탈 털어서 하얀 종이에 놓고 두 겹 세 겹 고이 접어서 자기 항아리에 담겠지. 다시 나무함에 넣고 하얀 보자기로 꽁꽁 싸서 아들에게 전해지겠지. 영화처럼 강물에 뿌려질까, 아니면 나무 밑에 묻으려나. 아마도 봉안당의 칸칸이 나누어진 선반에 안치할 거야. 그곳은 출입문과 긴 복도 뿐, 창도 없는 곳이다. 다행히 일 년 내내 습도와 온도는 일정하게 관리될 것이다. 그러나 환한 전등 아래서 밤낮을 어찌 구분하며 춘하추동을 어찌 알겠는가. 시계는 꼭 챙겨 가야겠다.
땅속이면 언젠가 흙이 되어 뭇 생명으로 환생할 텐데, 항아리 속 긴 유배 생활이 시작되겠지. 손 뻗으면 닿을 곳의 칸칸이 벗은 많다. 소곤소곤 자식들 자랑도 하고 할멈 영감 흉도 보고 이따금 나라 걱정도 할 거야. 개성 강한 이웃 만나면 누굴 찍었는지 어쩌니 하면서 고래고래 큰 소리도 지르고. 그런 중에 조심스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날 보러 오나 설레고. 가만히 다가와서 유리창 너머로 여긴가 저긴가 기웃거리는 눈동자는 대부분 모르는 이들. 그들이 각자의 믿음으로 두 손 모아 올리는 기도 소리에 믿음을 못 가진 나도 숙연해질 거야. 시공간이 멈춘 곳에 어느 날 많은 이들이 모여들면 명절쯤인가 여기면 될듯하다. 명절이 몇 개나 지났는지 헤아리다 끝내는 지칠 거야. 그러다 30년 안치 기간 만료되면 항아리 벗어나 흙으로 돌아가겠지. 그때 새로운 여행을 떠나자.
어디로 가나. 달? 아니면 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