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산 별명
겨우내 베란다 한편에 앉아서 햇볕을 즐기던 것이 달달한 죽으로 변신하는 날이다. 시골 사돈댁에서 얻어다 숙성시킨 늙은 호박이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어루만지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단단하다. 무쇠 칼을 찔러 토막을 내었다. 봄을 이미 알아차린 듯 속에서 씨앗이 발아하여 콩나물처럼 자라나 징그럽다. 칼질하게 좋게 주름 홈을 따라 자르고 껍질을 깎아내는 것까지가 내 일이다. 소화를 돕고 체중을 감량한다는 효능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저 맛있게 끓여져 식구들 잘 먹으면 그만이다.
고교 여름방학 때에 시골 친구 집에 놀러가 묵은 적이 있다. 냇가에 세수하러 다녀오니 친구 어머님이 호박을 따오란다. 흙 담장을 타고 호박 넝쿨이 기어오른다. 긴 수염은 허우적대며 뭔가를 휘감으려한다. 새벽녘에 피는 커다란 호박꽃은 짙은 노란색에 꽃잎이 두툼하다. 이슬 구르는 호박잎을 들치고 파란 애송이 호박을 따다 드렸더니 금세 구수한 된장찌개가 되어 밥상에 올랐다. 대청마루에서 먹은 그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도회와 다른 농촌의 풍경과 정취가 어울려서 더욱 그러 하리다.
호박은 종류도 다양해졌다. 애호박, 주키니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등. 죽으로, 볶음으로, 나물로, 전으로, 떡으로 다양한 요리로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채워준다. 그럼에도 호박에 관한 구전이나 속담은 탐탁치 않다.
나열하자면 호박꽃도 꽃이냐,
호박에 줄 긋는 다고 수박되나.
호박에 말뚝 박기.
못 먹는 호박 찔러나 본다.
뒤에서 호박씨 깐다 등이 그러하다.
호박은 왜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졌을까? 재미 삼아 쳇GPT에게 물어보았다. 짐작보다 상세히 알려준다. 요약하면 예로부터 대칭적이고 단정한 것을 미적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호박의 울퉁불퉁하고 불규칙적인 모양이 상대적으로 ‘못생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단다.
잘생긴 호박도 있다. 일본 나오시마(直島)의 노란 호박이다. 일명 예술의 섬으로 불리는 나오시마는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인 지중미술관과 이우환미술관도 관심거리이지만 노란 호박이 단연 인기다. 대략 2.5m 크기의 물방울무늬 플라스틱 조형물인데 해안 선착장에 외롭게 설치되어있다. 과거 ‘쓰레기섬’으로 불렸던 나오시마를 현대 미술의 성지로 거듭나게 한 작품이다. 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섬이었지만 노란호박 덕택에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나도 지난 2월에 나오시마에 갔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풍랑주의보가 내렸다. 작품을 안전지대로 대피시켜 실물은 볼 수가 없었고 아쉬움은 사진으로 달래었다. 아무튼 호박이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니 대단하다.
5살 손녀는 글씨를 배워 읽고 쓰기를 곧잘 하는데 어떨 땐 읽는 순서의 좌우가 바뀐다. 화이트보드에 써둔 식구들 이름을 읽는데 내 이름을 “진. 호. 박.”하며 거꾸로 읽었다. 세 살 터울 손자와 손녀가 왁작거리며 야단이 났다. “뭐야! 찐~ 호 ~ 박!” 할아버지가 ‘찐호박’이라고? 그래, 그래 할아버지가 진짜 호박이란다.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내 별명은 ‘호박’이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으니 이름자에서 연상하여 내 별명이 된 것이다. 6년간 반장을 내리 하였으니 반 친구들 간에 시샘도 작용했으리다. 그렇게 호박은 고향을 떠날 때 까지 친구들 간에 나의 호칭이었다.
I, C ~ ~. 이렇게 잘생긴 호박도 있냐?
사반세기 가까운 세월, 똘똘하고 잘생긴 얼굴은 간데없고 주름지고 꺼칠해진 노인네가 거울 속에서 아는 체를 한다. 저 늙은 호박을 뭣에 쓰나. 죽이나 쑤어서 이 빠진 노인네들 간식으로 나눌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