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느 하루

손녀 돌보며

by 운해 박호진

어둠이 내린 호수공원 산책 중에 버스킹 공연을 만났다. 귀에 익은 노래에 이끌려 사이의 벤치에 걸터앉는다. 하모니카와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젊은이에게 호응하며 더위를 식혀본다.

아내의 폰이 울리고 잠시 조용한 곳으로 피해 통화하고선 표정이 어둡다.

손녀가 많이 아프단다. 낮에 학교에서 먹은 것 다 토해내곤 저녁도 못 먹고 배를 움켜쥐고 있단다. 다행히 열은 없다는데 웬 탈일까. 연일 폭염이 계속되어 더위라도 먹었나? 오늘따라 방과 후에 태권도에 방송댄스 배우는 날이었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제 8살,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하교며 목욕이며 온갖 것을 엄마 없이 혼자서 해내는 대견스러운 아이다. 똘똘하고 튼튼하고 씩씩한 아이인데 또 아프다니. 코로나 초기에 증세가 심할 때에 걸려 보름간 격리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탓에 면역이 떨어졌는지 아픈 일이 잦아서 가끔씩 식구들을 놀라게 한다


사위 직장은 보스턴. 일 년에 두 번 와서 한 달씩 머물다가는 철새 부부다. 딸은 원주 혁신도시에서 직장 다니며 홀로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남들은 기회 닿으면 미국에서 아이들 교육시키려고 안달인데 딸은 직장을 버릴 수 없어 미국 못 들어간다 하고 사위는 세계 유수의 직장에 좋은 보수를 팽개칠 수 없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우스 농사짓는 시댁은 일 년 내내 손이 모자라니 결국 손녀 돌봄은 외할머니 몫이 되었다. 사실 우리가 노년에 용인으로 이사와 터를 잡은 것도 서울 반포동 아들네와 강원도 원주 딸네와의 내왕거리를 감안한 것이다.


아무래도 밤중에 달려가야 히나. 급히 집으로 돌아와 다시 통화하니 우선 기다려보잔다. 우선 병원이라도 가보아라 했지만 원주의 의료기관이 여기와는 다르다. 그나저나 내가 저녁에 반주를 마신 탓에 운전도 힘드니 우선 밤을 지내고 보자고 의논이 되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이가 울음을 터트린다. 배도 아픈데 어른들 의논을 들으며 덜컥 겁이 났나 보다.


이른 아침 통화에서 등교는 무리란다. 아내는 일정이 있고 나는 오전에 자동차 정비 예약이 있다. 의논 끝에 딸이 오전에 반차휴가를 내어 아이 데리고 병원 다녀오고 자동차 정비가 끝나는 데로 나 혼자 가기로 정했다. 서둘러 정비소 들러서 출발할 즈음 장염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착하여 아이를 보니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핼쑥하다. 할비가 이것저것 물으니 또 서러움이 받혔는지 울컥하여 에미 뒤로 숨는다.

의사가 당분간 죽만 먹이란다. 간도 조미도 안된 흰 죽이 뭔 맛이 있으랴. 한 숟가락 먹더니 숟가락만 뒤적인다. 딸은 서둘러 회사로 갔다.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 수행으로 업무가 많아 퇴근이 늦을 거란다. 손녀와 둘만 남으니 썰렁하다. 평소 같으면 재잘거리며 같이 놀텐데.

괜히 졸리기만 하다.

내가 간식으로 가져온 뻥튀기를 먹고 싶어 하여 조심스럽게 몇 개 먹여봐도 별 탈이 없다. 해가 기우니 배가 고픈가 보다. 꼬박 하루를 굶었으니 그럴만하다. 딸과 의논하여 맛없다는 죽은 제쳐두고 식빵을 구워서 먹였다. 약을 먹고 오후 내내 잘 놀았으니 더 탈은 없겠지.

작은 손녀는 어린이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온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언니가 먹다 남겨놓은 빵조각을 냉큼 집어 먹는다.

저녁을 먹여야 한다. 끓여놓은 죽을 맛보았다. 괜찮은데~. 입맛 돌게 간을 조금 더해야겠다. 아이들 짜게 먹이면 질겁을 하지만 우선 먹고 기운 차리게 해야지. 그래도 허사다. 두어 숟갈 떠다만다.


만 24시간이 손녀 걱정과 돌보기로 후딱 지나갔다. 내일 아침에 약속한 행사가 있어서 밤중에 운전하여 귀가한다.

내 아이들 키울 땐 몰랐는데 손주들 돌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새롭게 배운다. 거의 매일이 손주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간혹 급하게 불러대어 당황스럽다. 남이나 친지들과의 약속을 어길 땐 곤혹스럽다. 어떨 땐 예약한 여행을 손해를 보고 포기한 적도 있다. 다들 손주 키우면서 이해할 듯 하지만 너무 극성이라고 눈총 받을 때도 있다. 귀엽고 싹싹하게 굴며 할머니 할아버지 찾을 때가 훨씬 많으니 다 보상받는다. 손주들 데리고 여행 다니면 다들 부러워만 하더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어머니, 장모님의 시랑을 새삼 느낀다. 감사합니다. 튼튼하게 잘 키울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삶의 활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