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떠난 친구를 지우며
친구, 참 좋은 친구였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사귀어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그는 우리 집 가까이 하숙하며 다녔다.
날마다 같이 걸었다. 학교까지 5Km, 왕복 이십오 리 길이다.
행여, 버스를 타고 가는 친구들이 우릴 볼까 봐 통학길은 골목이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지만 사춘기의 우리는 부끄러웠다.
도시락 없이 다닌 6년,
목표는 단 하나! 열심히 공부하여 취업하고 돈벌어 밥 굶는 일만은 없애자.
친구, 형 같은 친구다.
두 살 위이니 형이다. 언제나 나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내가 타지에 근무하며 향수병에 어려워할 때 직장도 알선해 주고
회사 경영에 어려운 일 닥치면 기꺼이 찾아와 조언하고 격려해 주었다.
잦은 내왕으로 부부가 함께 친구다.
등산도 여행도 함께였다. 국내뿐 아니라 유럽 여행도 여러 차례다.
그는 직장을 떠나 울산에서 사업을 하더니 50을 넘긴 나이에 처가 곳에서
횟집을 열었다. 어촌 출신인데 앞서서 횟집을 하던 동생의 권유였다.
인심 후하게 장사하여 손님이 들끓었다.
수시로 우리 부부에게 생선회를 대접하였다. 그 무렵에도 비싼 음식인데.
어느 해 봄날 그가 불쑥 회사로 찾아왔다.
노크도 없이 들어서는 얼굴이 창백하다.
몇 달째 소화불량과 복통에 시달렸는데
여러 진료과를 전전하며 많은 검사 끝에 췌장암 진단을 받았단다.
의사의 보장은 겨우 3개월. 세상이 캄캄하다. 앞날이 막막하다.
아내에게도 못 알리고 나에게 먼저 달려온 친구.
차분하자. 먼저 상황을 정리하자.
아내에게 알려야 한다. 가족의 도움이 먼저다.
혹시나 하고 다른 병원에도 갔으나 진단 결과는 동일.
친구로서 할 일이 태산 같다.
사업 거두고 주변 정리하기, 아들 장가보내기, 아내의 홀로서기 준비 등....
고통은 접점 심해졌다. 모를 땐 견뎠는데 아니까 무섭고 암울하다.
날밤을 새우며 참아내는 고통.
가엾다.
안타깝다.
서둘러 아들 하나 결혼식 마쳤고 또 한 아들은 상견례 날을 받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친구는 행복해했다.
“밥 먹고 사는 게 소원이었는데 우리 성공했잖아?
아파트 생활에 온갖 전자제품 다 갖추고 사니 잘 살았지.
꿈도 못 꾸던 자가용 타고 다니고 해마다 해외여행 다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위로의 말이 무슨 소용이랴.
친구가 떠났다.
2015년 8월 아침이었다.
마약성 진통제마저 소용없는 고통에 배를 움켜쥐고 밤을 새운 날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한 줌의 희망도 없이 묵묵히 마지막을 맞는 기분.
얼마나 쓰라렸을까.
예순다섯, 허무하다.
친구를 보낸다.
2025년 8월,
벗과의 60년 인연을 벗어난다.
숱한 동기들이 먼저 떠나도 곧 잊혔지만, 그는 지난 10년 내내 내 친구였다.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10년간 쓸모없는 번호였다.
일정표의 친구 기일을 지웠다.
10년간 아파하던 날짜다.
그러나 가슴 속의 친구는 어찌 지우나.
“우리 잘 살았다, 친구야.”
마지막 한마디, 귓전에 맴돈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여름도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