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빨래
도회에 살았으니 빨래터는 냇가가 아니고 동네 골목 어귀 이였다. 겨울에도 햇살 좋은 날엔 아낙들의 빨래방망이 소리가 종일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 당시에도 상수도가 들어와 있었지만 어머니는 우물가에 나가서 빨래를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이웃과 소통의 장이었음이다. 두레박은 군용 화이바로 만들어졌다. 플라스틱 재질이어서 물위에 뜨는지라 물긷기가 쉽지 않다. 몇 번을 첨벙되어야 물속에 잠긴다. 간혹 남정네들이 물을 길어 빨래를 돕기도 했다. 좁다란 마당의 빨랫줄에는 백옥같이 하얀 빨래가 나부꼈다. 따스한 햇살 아래 흔들리는 하얀 옷가지의 포근함과 비누향은 어머니의 손길이고 냄새다.
어머니는 손님이 다녀간 후에 이불 호청을 뜯어서 빤다. 베갯잇과 이불 호청은 옥양목(玉洋木)으로 만들었다. 이불 빨래는 풀을 먹이는데 풀을 끓일 때 눌지 않게 젓는 일은 내 몫이다. 밀가루를 물에 풀고 끓이면 보글보글 거품을 토해낸다. 마치 갯벌 구멍에서 나오는 게거품 같다. 세탁후에 잘 행군 빨래를 풀물에 담그고 골고루 주물러서 풀이 잘 스며들게 하고 가볍게 짜서 그늘에서 말린다. 완전히 마르기 전에 다듬이질을 한다. 다듬이소리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제 민속촌이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잠결에 듣던 가장 포근한 자장가이기도 하였다.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다듬이질은 고된 가사 노동이었다.
내의나 수건 따위는 잿물을 넣고 양은 솥에서 삶아낸다. 다 마르기 전에 개어서 발로 자근자근 밟는다. 그 일은 형들이 해내었다. 고등학교 다니던 형이 빨래를 밟으며 소리 내어 외우던 독일어 정관사들이 생각난다. “데어 데스 뎀 덴….”
풀을 먹인 옷감을 다듬어서 곱게 기워 내는 어머니의 정성 어린 손길이 아련하다.
이 밖에도 빨래에 얽힌 기억들은 숱하다. 숯다리미가 달아오르면 치마 앞자락은 어머니 발끝에 밟고 끝자락은 우리들이 잡아당기게 하고는 다림질하던 모습. 입에 물을 가득 머금고 빨래감에 물을 뿜어내던 모습. 내의는 늘 뽀얗게 삶아서 입히셨지.
1969년 금성사에서 백조 세탁기를 출시하였다. 1980년대에 전자동 세탁기가 만들어지지 전에는 세탁, 탈수통이 분리된 2조식 세탁기였다. 30년 가까이 전자동세탁기의 방진(防振)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며 이룬 실적으로 나라에서 주는 큰 賞을 여러 차례 받은 나는 세탁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세탁기는 가사노동을 획기적으로 줄여서 여성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최근에는 건조기까지 널리 보급되어 빨래에서 완전 해방되었다 하겠다.
전자동 세탁기의 효율과 효능성에 대하여 아내의 생각은 사뭇 다르다. 물을 아낀다고 간혹 적은 양은 손빨래를 하여 탈수만 이용하기도하고 세탁기가 못미더워 ‘행굼’은 자동 설정되는 것보다 횟수를 늘린다. 또 건조기는 사지도 않고 베란다에 늘어서 말린다. 어머니 때의 빨래 방법 중 빨래 삶기는 지금도 늘 실천한다. 내의나 수건 행주, 걸레 따위는 꼭 삶는다. 삶는 용기도 어머니때 쓰던 낡은 알루미늄 대야다. 주방의 인덕션에서 사용이 불가하니 베란다 바닥에 전기렌지를 따로 놓고 삶는다. 삶아낸 빨래의 비눗물을 헹구고 세탁기에 넣어 다시 헹굼과 탈수를 한다. 그 수고 덕에 늘 뽀얀 내의를 입고 상긋한 냄새가 밴 수건을 쓴다.
맞벌이 아들네는 빨래 삶기는 엄두를 못 내니 하얀 색 수건은 금세 누렇게 변하여 쓸 수가 없다. 기념품으로 얻는 타올 중에 하얀 것은 우리가 쓰고 유색은 걔들에게 준다. 매일 빨아 쓰고 건조기에 말린다지만 횟수를 더하며 부드러움은 없어지고 냄새도 살짝 불편하다. 옷감이 변하고 이부자리도 세탁기 사용이 가능한 소재로 바뀌었지만 수건은 그럴 수가 없다. 손자가 쓰는 목욕 수건만큼은 아내가 집으로 가져와 삶아 보낸다. 손님방 침대에 면직물 시트를 깔고 걔 네들 다녀가고 나면 이부자리 모두를 세탁하는 수고를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