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편 지
최근에 손 편지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가족들과도 e메일이나 SNS로 소통한지가 20년 가까이 되었으니 얼마 만에 받아보는 손 편지인가. 지난해부터 여섯 살 손자 손녀가 경쟁하듯 전해주는 손 편지를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그마한 손으로 색연필을 쥐고 삐뚤빼뚤 인사말을 쓰곤 귀여운 그림들도 그려 넣어 준다. 생일 축하며 크리스마스나 새해 인사말 등을 정성들여 적은 편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아라 하며 칭찬하니 신이 나서 이젠 올 때마다 편지를 써준다. 상자가득이 모였으니 잘 간직하였다가 얘들이 자라면 보여주어야지. 그러고 보니 안방 장롱 맨 위 칸엔 오래된 종이상자가 하나 있다. 받은 편지를 보관한 상자이다. 짧아도 20년 길게는 50년 전의 것이다. 오랜만에 편지 상자를 열어보았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묵은 내음과 함께 소록소록 쌓인 기억을 쏟아낸다.
당연히 군대 시절 받은 편지들이 제일 오래된 것이다. 대부분 친구들의 위문편지이지만 얼굴도 기억 안 나고 봉투에 쓰인 이름마저도 생소한 아가씨들 편지도 더러 있다. 사내들의 편지에는 우정이 가득하고 여자애들 글에는 풋풋함이 되살아난다. 그 땐 그랬었지. 아련한 기억이 스치지만 잠시뿐. 다 제쳐두고 가족과의 편지를 찾아서 행복 가득한 시절로 되돌아 가본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는 편지는 봉투도 없이 누렇게 퇴색된 갱지뭉치이다. 아내와 맞선을 보고 만나 결혼 전에 주고받은 것과 아내가 출산을 위해 친정에 머물며 두어 달 떨어져 있던 때 주고받은 편지이다, 우편으로 보낸 것이 아니고 대부분 밤마다 적어서 모았다가 만날 때마다 전해주었으니 우표 붙은 봉투는 없다. 다시 읽어 보아도 재미있다. 내가 쓴 글에는 구절구절 그리움이 가득하고 가지런한 아내의 글에는 사랑이 소록소록 맺혀있다. 내가 지방에 근무할 즈음이었는데 당시 시골에는 자석식 전화기만 보급되었었다. 전화를 할라치면 전화통의 핸들을 돌려서 우체국 교환을 불러 연결을 부탁한다. 더구나 시외 전화는 미리 신청을 하였었다. 장거리 회선의 차례가 돌아오면 교환양이 교환대의 잭을 꽂아 연결해주는 방식이었다. 통화가 잘 연결되었는지 교환이 잠시 확인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용이 궁금한 교환 아가씨들이 엿듣는 수도 있어서 꿀 발린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피차 주변의 사람을 의식하여 전화로는 달콤한 말은커녕 따뜻한 인사말 주고받기도 쑥스러웠다. 그러니 속 깊은 말은 글로써 주고받을 수밖에. 둘이서 글월로 쌓은 사랑이 만리장성이다. 다시 보니 어쭙잖은 사연들로 채워졌지만 어느 한 장 버릴 수가 없다.
가장 두툼한 편지 뭉치는 아들의 군복무 동안 주고받은 편지다. 제일 먼저 보낸 편지는 훈련소에서 소속 연대를 알려오기도 전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훈련 연대를 짐작으로 헤아린 주소로 보낸 것이다. 놀랍게도 다른 훈련병보다도 열흘이나 빠르게 받아 보았단다. 그에 답하듯 아들도 틈틈이 꼬깃꼬깃 종이쪽지마다 글을 써 모았다가 집으로 보내는 옷 뭉치에 몰래 넣어 보내왔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들에게 편지 쓰기는 제대할 때 까지 계속되어 100회에 달했다. 24개월 복무이었으니 한주도 안 빠지고 매주 꼬박 꼬박 편지를 쓴 셈이다. 제대할 때 까지 모았다가 고향 집에 맡긴 것을 지금껏 보관하고 있다. 물론 아들이 답장으로 보내온 편지도 한 묶음이다. 지금 다시 헤아려 보니 그것도 무려 64건이다. 말로는 다할 수 없었던 가족 이야기, 삶의 대한 경험과 조언들을 아비와 자식 간에 소통한 것이다. 이런 사랑을 지금도 주고받으면 좋으련만 직장일로 가정일로 제 일이 산더미니 근년에는 출근길에 하는 전화 인사가 고작이다.
대화는 금세 잊히지만 글은 오래 간직된다. 편지는 상대에게 내 소식이나 마음을 보내고 그 글이 상대에게 남게 되니 진지하게 쓰고 진솔하게 표현한다. 다 쓰고서 다시 읽어보고 성에 차지 않거나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 쓰기도 한다. 나중에 후회스럽거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일거다. 그러나 요즘은 편지가 구시대 유물처럼 거의 사라져간다. 전화 통화로 안부를 주고받거나 대소사 고지도 문자 알림으로 바뀌었다. 사실 전화나 SNS 소통이 편하고 빨라서 참 좋다. 그러나 어느 날 한참 소식이 없던 친지나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면 가슴 설레고 두 번 세 번 읽으며 내용을 새길듯하다. 늘 만나는 가족일지라도 새삼 편지를 받는다면 내용이 여하 간에 정에 겹고 한걸음 가까워짐을 느낄 것이다. 굳이 손으로 쓰고 우표를 붙여 보내는 편지가 아니면 어떠랴. e메일로 보내어도 충분히 교감한다. 문명의 이기(利器)는 잘 사용하는 자의 것이다.
이번 주말엔 오랜만에 아내에게 편지를 써보자. 벌써부터 미소 지으며 읽는 모습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