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아래에서 지속가능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무런 비용 없이 이미 지나간 과정을 되돌릴 수 있을까?
열역학은 이를 ‘가역 과정’이라 부른다. 계와 주변이 무한히 작은 변화만 거쳐 진행되며, 역순으로 밟으면 처음 상태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무한히 작은 변화’라는 정의에서 알 수 있듯, 이 과정은 극도로 느리고 균일하게만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역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여 가능하다 해도, 속도가 무한히 느리기에 아무런 실용성도 없다. 가령 배터리가 완전히 가역적이라면 효율은 100%에 가깝겠지만 출력은 0에 수렴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시간’이라는 비가역적 법칙 아래에 산다. 가역 과정은 이상일 뿐, 현실의 길은 언제나 마찰과 손실, 그리고 속도를 요구한다.
기후 변화도 다르지 않다. 이 문제가 진정한 ‘문제’로 다뤄지는 이유는 결국 시간 때문이다. 대응은 언제나 늦고, 선택은 언제나 제약된다. ‘지속가능’이라는 말조차도 사실은 과거로의 복원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의 비가역을 택하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는 5편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정당성에 동의하면서도 우리—세상 사람들, 또는 각 국가—는 정작 행동에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기후 변화가, 어쩌면 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인정하면서도 왜 행동에는 망설임이 따를까? 왜 필요한 대응이 뻔히 보이는 것 같아 보임에도 그것을 하지 않거나, 또 하지 못할까?
기후 변화는 모두의 문제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모두’를 위해 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기적일 수는 있어도, 모두를 위해 이기적이기는 어렵다.
만약 우리가 정말 인류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훨씬 단순해질 테다. 그저 기후 대응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당위성에 따라 행동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고, 또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제약 속에서 살고, 또 모두의 행복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편에서 다룰 배출권, ESG, 보조금과 같은 금융적 대책들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 우리가 ‘모두’를 위해 살지 않음에도, 또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지 않음에도, 결국 기후 변화에 대응하도록 강제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문이 따른다. 11편에서 ‘전환의 필연성’을 설명하며 언급했던 ‘유니버설 오너’ 개념처럼, 전환의 유인 자체가 경제 체제 내부에서 이미 불가피하게 발생한다면,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단순히 우리의 자유를 제약하는 강제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물론 기후 변화는 현실로 환원될 수 있는 광범위한 리스크라는 점에서, 단순히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전환의 유인이 완전히 억제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유인이 시간의 비가역성이라는 조건을 고려할 때 과연 충분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사회 문제에 대해 “외부에서 손을 대지 말고, 경제가 안정될 때까지 시장의 자율적 회복력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케인스는 장기 균형만 믿고 현재를 방치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 보았고, 단기적으로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The long run is a misleading guide to current affairs.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Economists set themselves too easy, too useless a task if in tempestuous seasons they can only tell us that when the storm is past the ocean is flat again."
기후 변화는 그 어떤 문제보다 시간적 제약에 민감하고, 또 비가역적이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금융적 대책들을 단순히 자유를 억제하는 강제 수단으로만 보는 것 또한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물론 그것들이 실제로 얼마나 제대로 작동할지는, 이제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탄소세와 배출권 거래제는 공통적으로 배출에 가격을 붙여 기업의 선택을 유도한다. 기업은 이 신호를 보고 감축을 할지, 아니면 비용을 지불할지를 결정한다. 핵심은 기업마다 한계감축비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기업은 같은 1톤을 싸게 줄일 수 있지만, 다른 기업은 훨씬 비싼 비용을 치른다. 시간이 지나면 설비 교체, 공정 개선, 학습효과로 이 비용 구조가 달라지고, 시장가격은 이런 차이를 정렬해 저비용 감축부터 유도한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 효율성만 설명할 뿐, 장기적 전환의 동학을 충분히 포착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불가역적 전환투자와 그 상호의존성에 있다. 당장의 선택만 보면 “한계감축비용이 가격보다 낮으면 줄이고, 높으면 산다”는 단순 규칙이 작동한다. 그러나 대규모 설비 전환은 다르다. 내가 먼저 투자하면 시장 전체 감축량이 늘어나 향후 가격이 하락하고, 이는 내 투자수익률을 깎아먹는다. 따라서 합리적 기업은 “다른 기업이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자”는 유인을 갖는다. 모두가 이런 선택을 하면 전환은 지연된다. 총배출량이 제도적으로 제한되더라도, 조기 투자 부재는 평균 감축비용을 높이고, 학습 효과를 잃게 하며, 고탄소 자산의 락인을 강화한다. 본질은 동태적 투자시점 게임(선점 vs 지연)으로, 시장집중/은행규칙/정책기대가 소모전(war-of-attrition)형 지연을 만든다.
예를 들어 기업 A의 평균 한계감축비용이 20, B는 60, 현재 배출권 가격은 45라고 하자. 두 기업 모두 설비 교체를 통해 비용을 20씩 낮출 수 있다. A가 먼저 투자하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추가 감축으로 시장 전체 수요가 줄면서 가격이 30까지 떨어질 수 있다. 은행·차입 규칙이 미비하고, 할인율이 높아 미래 절감 편익이 과소평가되면 A의 회수율은 악화된다. 반면 B는 “지금은 사서 버티고, 가격이 떨어진 뒤에 투자한다”는 계산을 한다. 결국 양측 모두 기다리고, 사회적으로는 전환이 늦어진다. 단발의 가격 반응은 잘 작동해도, 불가역적 전환의 시점을 누가 먼저 택할지는 상호기다림으로 귀결된다.
배출권 경매에서는 정보 비대칭이 결합해 베이즈 게임 구조가 나타난다. 기업은 각자 한계감축비용, 전환비용, 정책 전망에 대한 사적 정보를 갖고 있다. 균일가 경매에서는 대규모 수요자가 의도적으로 수요를 줄여 가격을 낮추려 하고, 차별가 경매에서는 입찰가를 보수적으로 제시해 승자의 저주를 피하려 한다. 시장 집중도가 높고, 은행·차입 규칙이 느슨할수록 이런 전략은 강화된다. 상대가 고비용이라면 가격 상승을 예상해 미리 비축하고, 저비용이라면 가격 하락을 기대해 투자를 미룬다. 그 결과 과소 감축이나 불필요한 비축이 나타나고, 왜곡된 결과는 다시 투자 유인을 약화시킨다.
탄소세도 마찬가지다. 세율은 제도적으로 정해지지만, 기업은 그것이 유지될지, 언제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신호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업종별 로비력, 여론, 규제기관의 신뢰도 등이 그 판단의 근거다. 저비용 기업이라도 “세율이 곧 낮아질 것”이라 생각하면 투자를 미루고, 고비용 기업이라도 “세율이 오를 것”이라 예상하면 지금 일부 전환을 서둘러 위험을 줄인다. 이처럼 정책 신뢰 부족은 위험 프리미엄을 만들어내어, 동일한 세율 하에서도 전환투자의 순현가를 악화시킨다. 따라서 탄소세가 존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효율적 감축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탄소 가격제는 단순한 정렬 장치가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효율적 배분을 유도하지만, 불가역적 투자와 정책 기대, 정보 비대칭이 얽히는 순간 협력 지연과 후생 손실이 발생한다. 경매에서는 수요축소와 승자의 저주 회피가, 세제에서는 정책 신뢰 부족이 이러한 기다림의 전략을 강화한다. 가격 수단은 필요불가결하지만, 현 조건에서는 협력 불안정성과 정보 비대칭이라는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나며, 이것이 장기 전환의 속도와 효율성을 심각하게 제약할 수 있다.
녹색금융의 신호 게임적 성격은 단순한 정보 비대칭을 넘어, 곧바로 시장 왜곡과 자본 배분 왜곡으로 이어진다. 투자자는 기업의 생산공정이나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실제 배출량이나 전환 투자 규모를 직접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ESG 지표, 지속가능성 보고서, 외부 인증이나 공시 자료 같은 간접적 신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신호가 관찰은 쉽지만 검증은 어렵다는 특징을 갖는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친환경 성과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질적 내용은 불완전하거나 조작 가능하다.
기업은 이 구조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유인을 가진다. 비용이 크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설비 전환 대신, 단기적으로 친환경 이미지를 확보하기 쉬운 프로젝트—예를 들어 재생에너지 구매 계약(PPA)이나 소규모 친환경 사회공헌 활동—를 강조할 수 있다. 또 회계상 분류를 조정해 기존 투자를 ‘녹색 투자’로 재포장하거나, 측정 지표 중 자신에게 유리한 항목만 선택적으로 보고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처럼 비교적 저렴한 방법으로도 ESG 평가에서 긍정적인 점수를 얻을 수 있다. 결국 투자자에게 전달되는 신호는 ‘우리는 친환경적이다’라는 메시지이지만, 실제 배출 감축 성과와는 괴리가 발생한다.
이때 균형의 성격은 신호비용과 검증 강도에 달려 있다. 만약 보고·보증·감사 등 신호 비용이 낮고 검증 장치가 약하다면, 모든 기업이 형식적으로만 신호를 강화하는 풀링 균형, 즉 그린워싱 균형이 나타난다. 반대로 신호 비용이 크고 검증이 엄격하다면, 일부 기업만이 진짜 투자와 성과를 통해 신호를 보낼 수 있고, 시장은 부분적으로라도 분리 균형에 도달한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대체로 신호 비용이 낮고 검증 장치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풀링에 가까운 균형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투자자는 불완전한 신호에 기반해 결정을 내리고, 자본은 고비용·고위험의 전환 프로젝트보다는 신호 관리에 능한 기업으로 흘러들기 쉽다. 경쟁 기업이 모두 신호 경쟁에 뛰어들면, 개별 기업 입장에서도 실질적인 혁신보다 이미지 관리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인 전략이 된다. 마치 탄소 가격제에서 상호기다림이 전환 지연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녹색금융에서는 그린워싱 경쟁이 자연스러운 균형으로 자리 잡는다.
문제는 이 균형이 사회적으로 극히 비효율적이라는 점이다. 대규모 재생에너지 설비, 탄소 포집·저장 기술, 고효율 산업 설비 교체와 같은 실질적 전환 프로젝트에는 자본이 충분히 흘러가지 못하고, 조작 가능한 신호 관리에 더 많이 쏠리게 된다. 그 결과 녹색금융은 ‘녹색’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전환을 앞당기는 대신 오히려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며, 사회 전체적으로 자원 배분의 왜곡과 감축 지체라는 비용을 발생시킨다.
보조금 등의 조치들은 보통 Stackelberg 게임의 성격을 갖는다. 정부는 리더로서 감축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보조금 제도를 설계하고, 기업은 팔로워로서 이에 대응한다. 문제는 정부가 기업의 내부 비용 구조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기업이 낮은 비용으로 감축할 수 있는지, 또 어떤 기업이 구조적으로 고비용을 감당해야 하는지는 기업만이 아는 사적 정보다.
따라서 기업은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유인을 갖는다. 실제보다 감축 비용을 높여 보고하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달성 가능한 목표를 축소 보고하면 적은 노력으로도 보조금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전형적인 주인–대리인 문제로, 정부는 사회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려 하지만 기업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정보를 왜곡한다.
보조금이 지급된 이후에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업이 약속한 설비 전환을 실제로 이행하지 않고 외형상 보고만 맞추는 도덕적 해이가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기존 설비를 유지하면서도 보조금으로 단순 개보수를 “전환 투자”로 포장하거나, 배출 측정 방식을 유리하게 조정해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꾸밀 수 있다. 정부가 사후 검증을 강화하더라도 감축 성과를 완전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로 인해 보조금 정책은 투자를 장려하는 긍정적 효과와 동시에 효율성 손실을 내포한다.
Myerson–Satterthwaite 정리를 잠깐 참고하자면, 정보가 비대칭적으로 분포한 상황에서 예산균형·유인적합성(IC)·개인합리성(IR)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면서 완전한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보조금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가 아무리 정교한 제도를 설계하더라도, 기업의 비용 구조를 완벽히 파악할 수 없고, 일정 수준의 정보임대(information rent)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공적 금융과 보조금은 기후 대응을 위한 필수적 수단이지만, 동시에 구조적으로 비효율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세 가지 메커니즘을 나란히 두고 보면 공통된 한계가 뚜렷하다.
탄소 가격제는 불가역적 투자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장기 전환이 지연되는 소모전 구조를 낳는다. 녹색금융은 검증이 약하고 신호비용이 낮은 조건에서 풀링 균형, 곧 그린워싱 경쟁으로 빠져 자본을 이미지 관리에 쏠리게 만든다. 공적 금융은 보조금의 유인과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주인–대리인 문제와 도덕적 해이를 피할 수 없고, 지원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결국 세 장치는 모두 기후 대응을 위한 핵심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전략적 상호작용에 얽혀 구조적 비효율성을 노출하는 이중성을 가진다.
여기까지 보면 결론은 비관적이다. 마치 어떤 제도를 도입하든 기다림, 왜곡, 도덕적 해이가 반복되는 듯 보인다. 가격제도, 금융도, 보조금도 각각의 한계로 인해 완전한 효율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금융적 대책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
– 정말, 그렇기만 할까?
메커니즘 디자인은 정보경제학 및 게임이론의 하위 분야로, 목표한 균형이 나오도록 게임의 규칙 자체를 설계하는 방법론이다. 앞서 드러난 가격제·녹색금융·보조금의 구조적 한계는 곧바로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몇 가지 방법론을 이용해,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바라보자.
탄소 가격제의 가장 큰 병목은 불가역적 전환투자가 서로의 기대에 묶여 ‘기다림의 균형’으로 수렴한다는 점이다. 기업은 대규모 설비 교체나 공정 혁신을 서두를 경우, 다른 기업들이 뒤따르면서 배출권 가격이 하락하고, 그 결과 자신의 투자수익률이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상호기대 속에서 각자는 선제 투자를 미루게 되고, 총량 규제가 존재하더라도 전환 시점은 구조적으로 늦춰진다.
메커니즘 디자인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제도 자체가 조기감축의 가치를 가격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목표는 세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조기감축의 순현재가치를 보전하는 규칙 설계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경매나 시장의 형식을 수입극대화가 아니라 투자 유인 교정의 기준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장치가 핵심적이다.
첫째, 시장 안정화 메커니즘이다. 배출권 가격이 과도하게 하락할 경우 예비분을 흡수하고, 반대로 급등하면 예비분을 방출하는 방식(유럽연합의 MSR과 유사한 장치)을 두면 가격 폭락에 따른 조기투자자의 위험을 완화할 수 있다. 동시에 가격 하한·상한의 밴드 규칙을 명시하면, 기업은 미래 가격경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확보한다.
둘째, 은행·차입 규칙과 금리 경로의 연동이다. 현재 감축해 저장한 배출권이 시간이 지나도 정책적 경로에 맞추어 일관된 수익률을 제공한다면, 조기투자의 순현재가치는 지켜진다. 이 구조는 Hotelling 법칙형 기대와 정합성을 맞추는 방식으로 설계될 수 있다.
세제에서도 원리는 동일하다. 단순히 세율 수준만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율 경로를 중장기적으로 법제화하고, 자동적으로 지표에 연동되는 조정 규칙을 도입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정책변동 위험에 따른 프리미엄이 줄어들고, 같은 세율하에서도 기업의 전환투자 NPV는 커진다.
정리하면, 탄소 가격제의 병목은 기업이 전략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의 규칙이 조기감축의 가치를 제대로 가격에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격밴드·예비분 조정 같은 안정화 장치, 은행·차입 규칙의 금리 연동, 세율 경로의 신뢰성 확보를 통해, 동일한 총량 규제나 세율 아래서도 게임의 성격은 ‘기다림’에서 ‘조기감축이 보상되는’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
녹색금융의 핵심 병목은 기업의 실질적 감축 노력을 투자자가 직접 관찰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따라서 메커니즘 디자인의 관점에서 과제는 단순하다. “완벽한 평가 규칙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신호의 조작 유인을 줄이고 진짜 전환 노력을 유리하게 만드는 규칙을 만들 수 있는가이다.
이를 위해서도 중요한 축을 크게 두 개 정도 꼽을 수 있겠다.
첫째, 신호 비용과 검증 강도의 재설계다. 보고·감사·보증 절차의 비용을 높이고, 표준화된 다차원 지표를 사용하며, 위반 시 불이익을 강화하면, 표면적 신호 경쟁은 덜 매력적이 된다. 즉, 신호 관리보다 실제 투자가 더 ‘가성비 있는 전략’이 되는 것이다.
둘째, 자본 배분의 매칭 구조 개선이다. 단순히 기업이 신호를 내고 투자자가 해석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성과연계 금융상품(예: 지속가능연계채권, 전환목표 달성 시 금리 인하/미달 시 페널티)을 통해 투자자와 기업이 상호 조건부 계약을 맺게 만들면, 이미지 관리보다는 실질적 행동이 유리하다.
핵심은, 녹색금융의 병목은 “기업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호 구조가 조작 가능한 상태로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칙을 바꾸면 균형도 바뀐다. 신호 비용과 검증 강도를 높이고, 성과연계 금융상품을 제도화하면, 자본은 단기적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장기적 전환 프로젝트로 흐를 수 있다.
보조금 등의 조치들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설명해보자. 이것들은 앞서 말했듯 정부가 리더로서 감축 투자를 촉진하는 전형적인 Stackelberg 구조를 가진다. 문제는 정부가 기업의 내부 비용 구조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기업은 낮은 비용으로도 감축할 수 있고, 어떤 기업은 구조적으로 높은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정보는 기업만이 알고 있다. 따라서 기업은 보고를 과장하거나 목표를 축소해 자신에게 유리한 보조금을 얻으려는 유인을 가진다. 이는 정보임대(information rent) 문제다.
메커니즘 디자인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원칙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Myerson–Satterthwaite 정리가 보여주듯, 사적 정보가 존재하는 환경에서는 예산균형·유인적합성·개인합리성을 동시에 만족하면서 완전효율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목표는 완전효율이 아니라 차선 설계다.
차선 설계의 방향은 두 가지다.
첫째, 성과 기반 지급이다. 단순히 보고만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 감축 성과가 확인될 때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미달성 시 환수(클로백)하는 구조를 도입하면, 도덕적 해이를 줄일 수 있다.
둘째, 역경매나 스코어링 경매 방식의 도입이다. 기업들이 스스로 필요한 지원 규모와 감축 목표를 제출하고, 정부가 이를 경쟁 입찰 형식으로 평가·선정하면,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기업부터 지원을 받도록 유도할 수 있다.
따라서 보조금 정책의 본질은 “완전 효율을 보장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불가피한 정보임대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고, 그것이 도덕적 해이로 번지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완전한 1차 최적은 불가능하지만, 차선의 제도 설계를 통해 여전히 전환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가격제도, 녹색금융, 보조금 모두가 각각 기다림, 그린워싱, 도덕적 해이로 귀결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메커니즘 디자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 한계는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여지다.
규칙을 고치면 게임의 성격도 달라진다. 결국 금융적 대책의 힘은 완전성을 보장하는 데 있지 않고, 불완전성을 관리 가능한 균형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어떤 제도 설계도 결국 인간의 불완전성과 해석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지금까지 수많은 이론들로 점칠해왔던 논증에서 잠깐 벗어나보자.
이론은 본질적으로 현실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도구다.
지금까지 써온, 자연과학이 다루는 대상들보다 더 불확실하고 비합리적인 존재인 인간을 다루는 이 이론들이 과연 그 자체로 진리일까?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지속가능한 성장’의 이야기 또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그저 그를 모방하고 복제한 가상, 또 하나의 시뮬라크르일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또 다른 시뮬라크르일지라도,
우리는 수많은 시뮬라크르 속에서 조금 더 나은 '최선'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설명은 더 나은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그 가능성 자체가 우리가 이 이야기들을 이어가야 할 이유가 된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이 이야기도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에 대응하는 '전혀 다른 현실의 가능성' 또한,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같이 또 다른 '현실'이라 불리는 것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