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에 대하여

쉬어 가며

by 강진영

앞서 우리는 에너지, 산업, 시장이 기후 변화라는 큰 맥락 속에서 어떻게 재편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흔히 말하는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틀에서 본다면 낙관적이진 않지만, 최소한 “아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라는 정도의 가능성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분야들은 우리의 삶과 매우 밀접하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상, 이 부문에서의 변화는 피할 수 없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변화는 단순히 가격표 숫자가 바뀌는 식으로 다가올 것이고, 또 어떤 변화는 일자리의 소멸과 창출처럼 사회 구조 자체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논의가 더 이상 고상한 담론이나 일부 감수성 높은 사람들의 문제의식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이 더 떠오른다.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뿐 아니라, 그 대응 과정까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은 단순히 환경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이는 정확히 2편에서 말했듯, 이 시리즈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근접한 생각이나, 엄밀하게 따지자면 다시 생각해볼 구석이 존재한다.


환경 문제?


만약 ‘환경 문제’라는 말이 단순히 깨끗한 공기, 맑은 물, 우거진 숲을 지향하는 것만을 뜻한다면, 기후 변화라는 문제의 전부를 이 개념에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기후 변화가 낳는 피해를 먼저 살펴보자. 가장 직접적이고 1차적인 피해는 공기가 탁해지고, 물이 오염되고, 숲이 훼손되는 식으로 나타난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히 ‘자연이 파괴된다’는 차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기후 변화가 미치는 영향은 결국 각 객체의 ‘대응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이 만든 제도나 기술, 즉 사회적 환경에 의존할 수 없는 존재일수록 변화에 취약하다. 숲속의 나무나 곤충, 새와 같은 생물들은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받는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흔히 ‘자연’이라고 부르는 객체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우리의 사회적 환경이 이 자연적 환경과 전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두 환경은 긴밀히 맞물려 있다. 숲이 파괴되면 토양이 무너지고, 이는 농업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진다. 해양 생태계가 교란되면 어업 기반이 붕괴되고, 그 여파는 곧바로 식량 가격 상승이나 지역 경제의 불안정으로 나타난다. 즉, 자연적 환경에서 발생한 피해는 곧 사회적 환경의 문제로 전가된다.


우리 같은 사회 구성원에게 피부로 와닿는 것은 대부분 이 ‘2차적 피해’다. 그래서 기후 변화 논의가 단순히 ‘환경 문제’라는 말로 묶이길 거부하는 흐름이 생긴다. 이 시리즈 역시 그랬듯, 담론의 초점은 흔히 자연적 환경의 피해보다, 그것이 사회적 환경에 어떤 충격을 주는가에 맞춰지곤 한다.


그렇다면 대응은 어떨까?


물론 숲을 복원하거나 습지를 보존하는 등의 자연 기반 해법(Nature-based Solutions)도 논의된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더 강조되는 것은 사회적, 특히 기술적 대안이다. 핵심은 ‘줄이지 않고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산업 활동을 축소하기보다는, 산업 활동을 계속하더라도 기후 변화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만드는 기술적 해법이 중심에 놓인다.


예컨대 제조업 전반에서 CCUS(탄소 포집·저장·활용) 기술이 과도기적 해결책으로 인정받는 것이 대표적이다. 대기 중의 탄소를 줄이는 대신, 배출된 탄소를 모아 저장하거나 활용해 문제를 완화하려는 방식이다. 또, 탄소세·배출권 거래제 같은 시장 기반의 대책도 이전 편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런 수단들은 모두, 경제적·사회적 활동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기후 변화의 충격을 줄여 보려는 시도다.


물론 이러한 접근에는 동의하지 않는 시각도 있다. “기술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근본적인 산업 구조나 생활 양식을 줄이는 변화 없이 과연 충분한 대응이 가능하냐”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해법들이 기후 변화 논의에서 계속 거론되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사회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은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고, 서로 깊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환경이 변하면 자연적 환경에 영향을 주고, 자연적 환경의 변화는 다시 사회적 환경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에너지, 산업, 시장이라는 주제도 결국은 기후 변화의 문제와 긴밀히 맞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하진 않지만 기후 변화는 환경 문제다.


이때의 ‘환경’은 자연만을 뜻하지도, 사회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 둘이 얽힌 현실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기후 변화로 인해 실질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환경’이라는 말에 따라붙는 막연한 느낌을 걷어내고 나면, 오히려 이와 같은 것들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질 ‘탈성장’ 이야기는, 흔히 지금까지 다뤘던 ‘지속 가능한 성장’ 담론과는 전혀 다른 맥락 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현재 체제인 자본주의의 근간인 ‘성장’ 자체를 부정하기에 탈성장 담론과 같은 이야기는 ‘이상적인 이야기’로 여겨지기 쉽다.


그렇다면 이 논의를 조금 더 현실적인 맥락에서 다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예컨대 자연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이 직접적으로 맞부딪히는 산림과 농업의 문제를 탐구하며 ‘환경’이라는 개념을 확장해 보고, 여기에 ‘정의’라는 렌즈—다만 이상론적인 접근보단 좀 더 현실적으로—를 덧씌운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보여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탈성장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의 모습'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주장에는 비판할 지점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이 탈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정도 세우고 난 뒤에는, 탈성장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비판에 대한 재비판까지 함께 살펴보며 한층 더 새로운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의미로, 이번 편은 쉬어 가는 걸로 하자.

절대 바빠서 그런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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