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성 위에 올려진 체스판
우리는 왜 기후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이제 낯설지 않다.
앞서 위험은 확실하지 않기에 더 위험하고,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선제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기후 변화의 불확실성과 비가역성이 오히려 그 대응의 당위성을 강화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정당성에 동의하면서도 우리—세상 사람들, 또는 각 국가—는 정작 행동에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기후 변화가, 어쩌면 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인정하면서도 왜 행동에는 망설임이 따를까? 왜 필요한 대응이 뻔히 보이는 것 같아 보임에도 그것을 하지 않거나, 또 하지 못할까?
기후 변화는 모두의 문제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모두’를 위해 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기적일 수는 있어도, 모두를 위해 이기적이기는 어렵다.
만약 우리가 정말 인류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훨씬 단순해질 테다. 그저 기후 대응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당위성에 따라 행동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고, 또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
더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 이 지구 위에는 약 195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각국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손익을 계산해 정책을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기후 대응은 어쩌면, 195명의 플레이어가 각자 다른 전략을 구사하는 복잡한 게임이라 봐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게임 속에서, 우리는 정말 모두가 똑같이 기후 대응에 총력을 다해 불확실성의 변수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혹시, 그런 이상적인 협력이 가능하다는 상상 자체가 애초에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던 건 아닐까?
한 번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두 명의 공범이 체포되어 각각 독방에 갇혀 있다. 그리고 검사는 둘에게 각각 이렇게 제안한다:
“네가 자백하고 상대는 침묵하면, 넌 풀려나고 상대는 5년형이다. 둘 다 자백하면 3년형씩, 둘 다 침묵하면 1년형이다."
당신이 침묵할 경우,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결괏값은 상대가 각각 침묵, 그리고 자백했을 경우 (1년, 5년)이다. 그러나 당신이 자백할 경우,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결괏값은 (석방, 3년)이다. 이 계산에 따르면,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당신에게 가장 유리한 전략은 자백이다. 그리고 상대 역시 같은 계산을 할 것이다.
결국 둘 다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경우 모두 자백하고, 3년형을 받게 될 것이다. 모두의 입장에서는 둘 다 침묵하는 게 더 나았지만, 각자의 합리적 선택은 이를 무너뜨렸다. 이 상황은 죄수의 딜레마라 불리는, 개인의 최선이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최악이 되는 것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역설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타나는 안정 상태—둘 다 자백하는 상태—를 내시 균형이라 한다. 내시 균형이란, 모든 플레이어가 자신의 전략을 바꾸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이득을 볼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 상태에서는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꾸는 쪽이 손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균형은 지금의 선택이 이상적이어서가 아닌, 누구도 먼저 다른 전략으로 이탈할 유인이 없기에 유지된다.
이 균형은 무너지지 않지만 항상 최선은 아니다. 비효율적이고 불만족스러워도 전략적 계산 속에서는 정당화된다. 그 결과, 집단은 이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손해 보는 구조에 갇히게 된다.
이제 이 구조를 기후 변화에 적용해 보자.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면 모두가 이득을 본다. 하지만 일부 국가들만 감축에 먼저 나선다면, 그 국가들은 단기적으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에 따르면, 이때의 유혹은 명백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굳이 줄이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당연히 이 생각은 거의 모든 나라가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모두가 먼저 줄이려 하지 않고, 상대를 관찰하며 기다리는 상태가 된다.
이게 바로 내시 균형이다. 아무도 먼저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기에 모두가 비효율의 상태에 머문다.
합리적이지만 위험한, 전략적으로 정당하지만 집단적으로는 파국적인 상태.
어느 누가, 먼저 침묵을 택하겠는가?
가장 직관적인 예시를 앞에 들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차례차례 기후 변화라는 문제의 특성을 이용해 이 게임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보자.
기후는 앞서 말했듯 모두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공공재의 특징은 누구도 배제되지 않으며 누구나 함께 누릴 수 있다는 데 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기여하지 않아도 남들이 기여한 혜택은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구조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전략은 명확하다. 가장 적게 기여하고, 가장 많이 누리는 것. 기후 대응이라는 이름의 공공재 게임에서는 덜 낸 자가 이긴다.
하지만 이 게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국가들은 오늘 협상하고, 내일 또 협상한다. 탄소 국경세, 감축 목표, 무역 조건, 외교 압력… 우리는 같은 상대와, 같은 판에서, 반복해서 이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반복되는 게임에서는 전략이 달라진다. 당장의 손해는 신뢰로 돌아올 수도 있고, 당장의 이득은 보복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 미래를 염두에 둔 전략은 현재의 선택을 바꾼다. 감축은 단기적으로는 비용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협력을 구축하는 ‘관계 자본’이 될 수 있다. 이 가정 아래에서는 협력은 이상적이기만 한 선택이 아니라, 조건부로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국가들은 각자의 타입을 갖는다. 사안에 따라 누군가는 진지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하는 시늉만 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정권이 교체됨에 따라 입장이 극적으로 바뀌기도 할 것이다. 각자는 자신의 타입을 알지만,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까지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알 수 있는 건 단지 현재의 발언들과 같은 신호들과 과거의 행동들 뿐이다. 내가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선택을 고려하는 것 또한 중요하기에, 내가 알 수 있는 것들—현재의 신호들과 과거의 행동들—을 토대로 상대방이 어떤 타입일지 추론해내야 한다.
그런데 이 추론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누군가는 감축 공약과 동시에 석유 생산량을 늘리고, 또 누군가는 ‘감축 계획’과 함께 석탄 발전소를 새로 짓는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기에, 국가들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관망을 이어간다. 협력은 미뤄지고, 움직임은 유보된다. 이런 베이즈 게임, 즉 이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흘러가는 게임에서의 균형은 또 하나의 새로운 균형점—베이즈 내시 균형—으로 수렴해 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건 하나를 더 추가해 보자.
국가는 과연 순수한 '단일 행위자'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195개의 국가를 각각 하나의 플레이어로 가정하고 게임을 구성해 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가는 단순한 하나의 의사결정자가 아니다. 정부는 그 내부에서 끊임없는 이해관계의 조정과 갈등을 겪는다.
한편에서는 탄소세를 도입하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산업계를 의식해 이를 유예하려 할 것이다. 외교부는 감축 목표를 상향하려 하지만, 재무부는 경기 침체를 우려해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결정권자들은, 결국 선거라는 정치적 리스크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국가는 내부적으로도 여러 개의 이해당사자들이 협상하는 장이다. 국제 협상은 이중의 게임이다. 하나는 국내의 정치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적인 협상 게임이다. 이 구조를 투-레벨 게임(Two-Level Game)이라 부른다. 한 국가의 협상가는 외국과만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정치 세력, 산업계, 시민사회와도 동시에 협상한다.
협상의 타결은 양쪽 모두의 합의를 필요로 한다. 국외에서는 충분히 협력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도, 국내 여론이나 이해관계가 발목을 잡는다면 협상은 무산될 수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게임은 고정된 상태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전략은 바뀌고, 조건도 바뀐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의 무임승차자가 다음에는 책임 있는 감축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는 단지 외교적 전략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바뀌고, 에너지원이 달라지고, 여론이 움직이고, 정권이 바뀌며 산업 구조 자체가 재편되기도 한다. 또 기후 자체가 바뀌면 이에 따라 더 좋은 선택지도 바뀌게 된다. 즉, 기후 대응 게임은 정지된 게임이 아니라 움직이는 게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략이 변하는 동역학적 게임이다.
이런 동역학적 구조에서는, 전략의 유불리를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 지금의 선택은 미래의 판을 바꾸기 때문이다. 한 국가가 감축 기술에 선제 투자하면, 향후 감축 비용이 줄어들고, 그것이 다시 새로운 전략의 토대가 된다. 또한 이는 타국의 전략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마주한 기후 협상의 구조는 단순한 전략 게임이 아니다. 당위성과 비용, 신뢰와 불확실성, 정치와 시간, 구조와 감정이 겹쳐진 복합 시스템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당위성"만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이 게임에서의 기후 대응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행동 하나하나는 곧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며, 국민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 행동의 무게는 생각보다 많이 무겁다.
그럼 결국 아무도 움직이지 않겠네. 아무에게도 선제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잖아.
정말 그럴까? 게임이 이렇게 복잡하다고, 단순히 "이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싶지는 않다.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어떤 전략이 끝내 살아남는가?
생물학에서 비롯된 진화 게임 이론은 전략이 생존과 번식—즉 복제—를 통해 세대에 걸쳐 선택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이론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것이다. 협력은 '멍청하지만 착한 전략'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적으로 생존 가능한 전략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진화 게임에서 전략의 합리성은 반복되는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들 속에서 검증된다. 우리는 게임의 과거를 기억하고, 전략을 모방하며, 경쟁 속에서 그 전략을 유지하거나 버린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단기적으로 상대를 속이는 전략은 결국 신뢰를 잃고 배제된다. 반면, '협력—배신에 대한 보복—그리고 용서'의 단순한 조합, 예컨대 ‘Tit-for-Tat’ 전략은 수많은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전략 중 하나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원리는 단지 실험실 안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제 외교의 세계, 기업 간 경쟁의 세계, 심지어 사람들의 일상적 상호작용에서도, 우리는 이 진화적 구조를 반복적으로 목격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세계는 수많은 개별 행위자, 즉 에이전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국가가 될 수도 있고, 도시가 될 수도 있고 또 개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완전한 정보 없이, 이웃과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단순한 규칙을 따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에이전트 기반 게임 이론(Agent-Based Game Theory)을 적용할 수 있다.
이 이론은 “누가 협력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협력은 생길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답을 먼저 주자면, 그렇다.
단지 일부 행위자들이 협력을 시작하면, 그 신호가 모방을 낳고, 모방은 확산을 낳는다. 일정 규모의 선도자가 기준점을 형성하면 다른 에이전트들은 그 신호를 기준 삼아 전략을 바꾼다. 몇몇이 먼저 기후 대응에 나섰을 때, 그것이 국제질서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표준이 되기도 한다. 영국이 2019년 처음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한 후, 2024년 9월까지 107개국이 2050 탄소중립을 선언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협력은 단순한 이타심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협력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한 합리적 선택이기도 하다. 누군가 먼저 협력의 신호를 보여주면 그것은 곧 모방을 유도하고, 이는 또 다른 모방을 낳는다. 이와 같은 연쇄 구조 아래서 협력의 전략은 확산되며, 하나의 흐름을 형성해 나간다.
물론 누군가는 배신을 선택해 일시적인 이득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은 반복되기에, 길게 봤을 때 결국 협력의 연쇄는 계속 퍼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진화 게임 이론과 에이전트 기반 게임 이론은 바로 이—어쩌면 낙관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협력의 확산과 정착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모두가 한꺼번에 바뀔 수는 없다. 그럼에도 몇몇 국가, 몇몇 기업, 몇몇 공동체가 협력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행동의 무게는 여전히 무겁지만, 누군가 먼저 짊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짐이 아닌 길이 될 수 있다.
기후 대응의 전략은 언제나 어렵다. 당위는 분명하지만, 너무 무겁다. 물론 몇몇 가능성들이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거운 무게를 짊어져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무게란 비용, 불확실성, 정치적 리스크, 기술적 제약, 대중의 수용성 등 복잡한 조건들이 결합된 총합이다. 그렇다면, 이 조건들을 바꿀 수 있다면 무게 자체도 바뀌는 건 아닐까?
조건만 바뀐다면, 이 게임을 아예 다른 게임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협력의 확산과 정착이라는, 어쩌면 낙관적으로 들리는 가능성에 기대지 않고서도 이를 해결해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기후 대응과 효율을 동시에 잡는 기술이 등장해 ‘행동의 무게’를 줄인다면—우리가 지금처럼 복잡한 계산과 전략으로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 정말 대단한 기술을 개발해 줄 거라는 기대야말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건 옳은 선택을 할 용기가 아니라, 선택이 더 이상 무겁지 않은 조건일지도 모른다.
다음 편부터는, 내가 기후 변화라는 문제를 처음 접했을 때 가졌던 질문—기술은 이 문제를 정말 ‘해결’할 수 있는가—를 다시 꺼내보려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어떻게 무너졌고, 왜 아직도 쉽게 버려지지 않는지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