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끝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길을 걸어왔다.
기후 변화가 정말 중요한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기후 변화가 단지 환경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생존 조건을 위협하는 구조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살펴보며, 이 문제를 논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이어 기후 변화가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맞서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과학적 사실의 토대를 되짚었다.
그리고 불확실성 속에서의 고찰을 통해
기후 과학의 불확실성이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대응의 필요성을 오히려 강화한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왜 우리는 행동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남아있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모두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는 명제를 중심에 두고
게임 이론의 틀 안에서 협력이 왜 어려운지, 그리고 얼마나 복잡한 전략적 장애물들이 놓여 있는지를 탐색했다.
그 흐름 속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것은, 종종 ‘편법’으로 간주되던 기술이다.
우리는 기술이라는 이름의 기적에 관하여
그것이 궁극적 구원이 될 수 없는 이유를 검토하면서도, 기술이 행동의 무게를 덜어주는 하나의 조건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제, 다시 출발점에 돌아왔다.
“기후 변화는 정말 중요하지만, 대응은 어렵다.”
이 말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그렇다면, 과연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다만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25년의 여름이다.
대학교에 다니느라 서울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잠시 고향인 제주로 내려왔다.
일주일 정도 머물다 다시 올라가겠지만 그 사이 부모님도 뵙고, 친구들도 만나고, 잠깐은 쉬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불과 1년 전, 나는 수능을 준비하던 고3이었다.
그땐 어떻게 그리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을까? 물론 돌이켜보면 내가 공부한 만큼 시험들을 잘 치지는 않았던 것 같으나, 마지막 시험에서의 결과가 좋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아직 어리다.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님과는 반 세기 가까운 나이 차가 난다.
기후 변화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만, 동시에 나는 아직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사람이기도 하다.
기후 변화에 처음 관심을 가졌을 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0년 남짓이다”라는 말에 이끌렸던 것 같다.
그 말을 따라 여러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이 문제가 단지 먼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게 전부였을까?
우리는 살기 위해 기후 변화에 대응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기후 변화라는 전 지구적 위기는,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을 완화하기 위해서든, 적응하기 위해서든, 우리는 크든 작든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
그런데 변화란, 생각보다 무겁다.
그 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게 내 삶에 어떤 파장을 남길지,
막상 눈앞에 닥치기 전까진 알 수 없다.
기후 변화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단연코, 가장 약한 이들일 것이다.
이상기후가 만들어낸 사회적·구조적 충격은 그들에게 버틸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40도가 넘는 날씨 속에 쓰러지는 이는
에어컨 밑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대기업 임원이 아니라,
땡볕 아래에서 휴대용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일하는 노동자일 것이다.
기후 변화로 인한 흉작으로 물가가 오르면,
그 충격은 햄버거 세트를 시켜 먹는 젊은 학생이 아니라,
하루하루 연금으로 살아가는 독거노인에게 먼저 닿을 것이다.
그런데 기후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전환 정책으로 전기요금이 인상된다면,
연금으로 하루를 버티는 노인은 과연 안전할까?
탈석탄을 위해 석탄 발전소가 폐지된다면,
그 ‘기피 시설’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과연 어디로 가게 될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을 마주하게 된다.
전환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전환조차도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정의로운 요구가 등장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는가?
보조금을 지급한다면, 그것은 정말 완전한 보상일까?
그들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을까?
“거대한 위협을 막기 위해 피해자에게 보상을 주자.”
필요하고 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맞는 말'이 모두를 지켜주지는 않는다.
여기, 하나의 사고 실험이 있다.
기차는 멈출 수 없고, 이대로 가면 선로 위 묶여있는 여섯 명을 치게 된다.
하지만 당신 앞에는 레버 하나가 있다.
그것을 당기면 기차는 방향을 바꾸고,
대신 다른 선로 위에 묶여있던 두 명이 치이게 된다.
트롤리 딜레마로 알려진 이 문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와도 닮아 있다.
기후 대응을 하지 않으면 더 많은 피해가 생긴다.
하지만 대응을 하더라도 역시
피해는 발생한다.
그리고 때로는, 전환하지 않았을 때 피해를 보지 않을 이들이
전환 때문에 새로운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레버를 당겼을 때,
당신은 그저 옳은 일을 한 것일까?
그 두 명은, 그 상황 때문이 아니라
레버를 당긴 당신 때문에 죽은 것 아닐까?
그들은, 당신이 죽인 것 아닐까?
물론, 우리는 대부분 레버를 직접 당기는 사람이기보다는
그저 선로 위에 묶여 있는 사람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나는
묶여 있는 동시에, 레버를 당기라 외치는 사람인 것만 같다.
아마 레버가 당겨졌을 때 당겨지지 않았을 때보다 내가 살아날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레버를 당기는 것이 맞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살기 위해 나는 누군가를 죽이려는 것 아닐까?
그들은 내가 살기 위해 희생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던 세상을 바꾼다는 건, 단 한 번의 기차 사고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없는 세상. 예전과는 달라진 세상.
그 변화 이후의 삶까지도, 역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많기에
가장 큰 전환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레버를 당기라 외쳤기에
가장 큰 전환의 가해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는 레버를 당기라 외칠 수 있을까?
레버를 당기라 외칠 수 없다면, 우리는
기후 변화라는 거대한 변화이자 위기를
그저 순순히 맞이해야 하는 걸까?
레버를 당기면 더 나은 결과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 순간부터
우리는 여섯 명을 살릴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제는,
레버를 당김으로써 그들을 살리는 것,
레버를 당기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죽이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레버를 당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선로 위 묶여있던 여섯을 죽이는 선택일지 모른다.
물론, 기후 변화의 문제에서
레버를 당긴다고 모두가 죽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조금 불편해지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편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
그건 단순히 "좀 불편하면 되잖아" 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공익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말이 실제로 그를 지켜줄 리 없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의 질을 일방적으로 낮출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공동체 전체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나는 변화를 강요하지 않겠다.
기후 변화는 불확실하고, 비가역적인 피해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또 현재, 그런 피해들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피해받는 당신의 삶을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전환으로 인해 피해받는 당신의 삶 또한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나는 그저
이 글을 읽고 바뀔 누군가를 위해
그 변화가 감정의 반응도, 그리고 도덕적 충동도 아닌
질문과 성찰을 통과한 자기 자신의 선택이 될 수 있도록
레버를 당겼을 때 얻게 될 것과
감수해야 할 것을
내가 아는 선에서, 가능한 한 충분히 제시하고자 한다.
펜이 칼보다 무거운 세상 위에서,
내 나름의 책임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