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

답은 이미 나왔는가

by 강진영
완벽한 정답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조건 속에서도 가능한 최선을 찾아가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기후 변화 대응이란


현재 검토되고 있는 기후 변화 대응의 방향성은 크게 완화적응으로 나뉜다.


완화는 기후 변화의 악화를 억제해, 불확실성과 비가역성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쉽게 말하면, 기후 변화를 막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여기에 포함된다. 대표적으로는 무탄소 에너지로의 전환이 있다.


반면 적응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기후 변화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이상기후에 대한 방재 대책을 마련하거나, 외부 환경 변화에 덜 민감한 산업 구조로 개편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완화와 적응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완화 정책을 펼치는 이유부터 살펴보자.


완화 정책의 핵심 목적은 기후 변화 자체를 억제하는 것이다. 이는 기후 변화가 불확실하고 비가역적인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기후 변화가 심화될수록 결과적으로 이득을 보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이를 억제할 유인은 기본적으로 모든 국가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기후 변화 억제에는 전 지구적 차원의 전환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완화 정책을 선제적으로 시행하는 국가는 다른 국가에 압박을 가할 수 있고, 동시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외교적 압박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러한 압박은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비례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거세질 것이다.


정책을 유예하고 버티는 쪽에서는 압박 해소를 위해서라도 완화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으며,

압박을 가하는 쪽에서는 지속적인 외교적 우위 확보 수단으로 완화 정책을 활용할 수 있다.

어느 입장이든 완화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진다.


더불어, 산업은 한 번 특정 경로에 들어서면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더라도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이를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 하며, 지금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미래의 유연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현재 완화 정책을 추진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미래 압박을 줄이기 위한 선제적 대응이기도 하다.


더 어려운 위치에 스스로를 몰아넣을 이유는 없다.

따라서 완화 정책을 펼치지 않을 합리적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적응 정책이 병행되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겠다.

적응 정책이 거론되는 이유는 이미 일정 수준의 기후 변화는 막기 어려운 정도까지 현재 도달해 있고, 기후 변화라는 문제의 특성상 막는다고 피해가 당장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는 최대 수천 년 가까이 대기 중에 잔류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 탄소중립을 달성하더라도,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는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상기후 피해나, 외부 환경 변화로 인한 산업 효율 저하는 국가에 직접적인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


완화 정책은 결국 피해를 줄이는 데 목적이 있고, 적응 정책 역시 같은 목적을 지닌다.

결국, 이 둘은 서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병행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후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완화하고, 또 어떻게 적응해나갈 수 있을까?

사실, 이는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미 모범답안은 나와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고, 재생 가능 에너지로 대체하는 것.

산업 공정에 저탄소 기술을 적용하고, 도시 구조를 에너지 효율적으로 전환하는 것.

나무를 더 심고, 벌채를 최대한 막는 것.

이상기후에 대비해 방재 시스템을 강화하고, 농업에는 스마트팜을 도입해 자원 대비 생산 효율을 높이는 것.

수자원 관리 체계를 개선하고, 폭염이나 홍수에 취약한 지역의 인프라를 보강하는 것.


만일 기후 변화 대응에서 어려운 것이 국제 무대에서의 눈치싸움 뿐이라면 이야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환경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라고,

단순히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복잡하게 이 문제를 들여다 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방금 이야기한 대책들은, 과연 동시에 시행될 수 있을까? 모두가 다 같은 친환경인걸까?

이들은 모두 ‘친환경’이라는 동일한 이름 아래 묶이기도 하지만, 그 ‘친환경’이 의미하는 바는 서로 상충하거나, 적어도 무관한 경우도 많다.

한 번, 태양광 발전이라는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태양광 발전은 정말 친환경적인가?


태양광 발전은 발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석탄이나 석유처럼 고갈될 우려가 있는 자원이 아닌, 태양광이라는 사실상 무한한 에너지원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높은 잠재력을 가진 에너지로 평가된다. 실제로 2025년 7월, 폭염 시기 최대 전력 수요가 발생했을 때, 태양광은 정오 무렵 전력 총수요의 약 24.7%를 담당했다. 이는 순간 출력 기준으로 원자력 발전소 약 20기에 해당하는 전력을 공급한 셈으로, 여름철 수요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태양광은 본질적으로 변동성이 큰 에너지원이다. 전력망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전력의 공급과 수요가 실시간으로 일치하며, 이를 통해 전력 계통 주파수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태양광은 날씨, 시간, 계절에 따라 발전량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수요가 많은 시간에 맞춰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어렵다. 특히 덕커브(Duck Curve)로 불리는 현상처럼, 태양광이 많은 낮 시간 이후 일몰 무렵에는 발전량이 급감해, 다른 발전원이 갑자기 대량의 전력을 공급해야 하는 구조적 부담이 발생한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에너지 저장장치(ESS)나 기존 발전원의 탄력 운전으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특히 ESS는 다른 발전원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 유용하지만, 아직 비용이 매우 높은 편이다. 설치 단가만 보면 태양광은 점점 저렴해지고 있으나, ESS 같은 보완 인프라까지 포함하면 여전히 전체 시스템으로는 높은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은 유럽과 달리 주변 국가에서 전력을 수입할 수 없는 독립 계통 구조이기 때문에, 태양광 비중이 높아질수록 ESS와 같은 보완 기술에 대한 의존도는 필연적으로 커진다. ESS의 기술은 태양광보다 더 복잡하고, 열폭주나 화재 등 안전 문제에도 더 민감하다. 이로 인해 ESS의 표준화대규모 보급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으며, 비용 하락 속도 역시 제한적일 수 있다.


기술적 문제 외에도 태양광 발전은 토지 자원을 직접적으로 소모한다. 원자력이나 화력 발전과 달리, 태양광은 산지에도 설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발전소가 산림을 개간하여 조성된다. 그러나 이는 자연 보전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탄소를 흡수하는 을 베고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행위는, 단기적으로 오히려 탄소를 더 배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태양광 발전은 공간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그 공간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자연 보전이라는 또 다른 환경 가치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태양광 발전과 ESS, 나아가 대부분의 재생에너지는 리튬, 니켈, 코발트, 희토류와 같은 금속 자원에 강하게 의존한다. 이는 우리가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면서도 여전히 어떤 자원 의존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어쩌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단지 석유 중심의 에너지 체계에서 희귀 금속 중심의 새로운 구조로 옮겨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글의 목적은 태양광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안으로 자주 언급되는 원자력 발전 역시 현실적으로 쉬운 선택만은 아니며, 원전과 재생에너지는 각각의 한계와 쟁점을 지닌 채 여전히 논쟁 중인 기술들이다.


또한, 여기서 언급한 단점들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기술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기술 낙관주의에 경계심을 갖는 것과 별개로, 현실에서 많은 이들이 이러한 한계들을 보완하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 또한 고려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서 재생에너지 성능 및 경제성의 큰 향상을 실제로도 이루어 냈기에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모두 낙관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그리고 전력망 구조와 기술 발전 전반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추후 에너지 부문에서 따로 깊이 있게 다룰 예정이다.


그러니 이번엔 질문을 조금 더 확장해보자.

우리가 익히 아는 '친환경적인 대안’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정말로 기후 변화 대응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기후 변화 대응’이라는 말 자체가 곧 ‘친환경’이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친환경은 곧 기후 대응인가?


스마트팜처럼 외부 환경에 덜 민감하고, 효율적인 지능형 농업 시스템은 기후 변화 시대에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들은 본질적으로 에너지 집약적이다. 설령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전력으로 구동된다 하더라도, 전체 에너지 수요 자체를 증가시키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도시 구조 전환 역시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효율 개선에 기여할 수 있으나, 단기적으로는 막대한 자원 투입과 폐기물 발생을 동반한다.


벌채 최소화는 의외로 기후 변화 대응의 핵심 전략으로 널리 다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2021년 발표된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는 산림의 불균형한 연령 구조를 근거로, 조림–숲 가꾸기–벌채목재 이용으로 이어지는 ‘산림순환경영’ 체계를 산림 부문의 주요 정책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개념에 대해서도 다룰 내용이 많기에, 구체적인 논의는 후속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기후 변화 대응은 일반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을 핵심 목표로 한다. 이러한 대응은 종종 '환경을 지키는 일', 나아가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 있는 행동'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말하는 ‘환경’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일상에서 ‘환경 보호’ 또는 ‘친환경’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푸른 숲, 맑은 강, 깨끗한 공기 같은 ‘자연’을 상상한다. 이처럼 '친환경'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자연을 보전하는 것’, 혹은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생태계의 원형을 유지하려는 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 대응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자연을 덜 훼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자는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지구의 대기권에서 온실가스 농도의 상승을 억제하려는 물리적·과학적 목표다. 이 목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보다도, '얼마나 감축하느냐', 즉 행동의 결과에 집중한다.


이 때문에 두 개념은 겹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자연을 덜 훼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온실가스가 감축되는 것은 아니며,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해 오히려 일부 자연 훼손이 수반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후 대응이 더 시급하다는 입장은 일정 수준의 생태계 훼손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자연 보전이 궁극적 목표인 입장에서는 기후 대응조차 자연 파괴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갈등은 원자력 발전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확인된다. 방사성 폐기물 등으로 인해 자연 보전 측면에서는 비판받는 원전도, 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후 변화 대응의 유력한 수단으로 거론된다. 같은 ‘친환경’을 내세우면서도 어떤 단체는 ‘탈석탄-탈원전’을, 어떤 단체는 ‘탈석탄-무탄소’를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전을 자연 파괴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과, 기후 안정화를 위한 도구로 보는 시각이 공존하는 것이다.


태양광, 스마트팜, 도시 구조 전환, 산림 경영 등 앞서 언급한 여러 대안들 역시 이와 같은 가치 충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기후 변화 대응에 관한 모범답안조차 간단할 수 없다.


풀 수 있는 답안을


여기에 더해 기후 변화 대응은 단지 ‘미래 세대의 환경’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크고, 훨씬 현재적인—'지금 살아가는 우리'와 '앞으로 살아갈 이들' 모두의 삶 자체에 관한 문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범적인 답안’이 아니라, 가능한 피해를 가장 줄여줄 실제적인 답안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안이 초래할 사회적 리스크 역시 피할 수 없는 고려 대상이다.


이 말은 곧 ‘점진적 전환이 항상 옳다’는 뜻도, ‘급진적 전환이 언제나 정의롭다’는 뜻도 아니다.

점진적으로 가는 편이 더 낫다면 점진적으로, 급진적으로 가는 편이 덜 아프다면 급진적으로—

우리는 결과를 기준으로 전환의 속도와 양태를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그조차 아직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풀이 없는 답안은 그저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고, 답안 없는 풀이는 곧장 딴 길로 빠지기 쉽다.

우리에겐 지금, 그나마 최선에 가까운 조합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편부터는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답안으로 내놓은 다양한 주장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 답안에 맞는 풀이들을 올려보려 한다.


그 첫걸음은 2018년 폴란드의 12월

세계 정상들 사이에서 기후 대응을 호소했던 한 어린 소녀에게서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