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가족이 다녀갔다. 고3 우리 아이 응원차 여행가는 길에 일부러 들려 소고기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간다. 응원의 말은 당연하다.
기분 좋은 만남이다. 여행지에서 하루를 추가로 더 묵을까 하다가 언니네와의 약속으로 정해진 일정만 지내고 온다. 그 정도로 기다려지는 만남이다.
아픈 엄마라도 살아계실 때는 1년에 몇 번씩은 만나는 사이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다. 아이들도 다 자랐고 각자의 가족들과 보내기에 당연해져버렸다.
사실은 '엄마'라는 구심점이 사라져버린 이유가 가장 크다. 아무리 각 가정이 커졌어도 엄마가 계셨다면 엄마가 지금 곁에 계시다면 더 자주 만나는 사이였을테니깐.
그렇기에 만남이 더욱 소중하다. 애틋함까지도 아니면서 괜히 만나는 날을 기다리게 된다.
만날 때마다 '오랜만'이 되는 만남이기에 반가움도 기쁨도 몇 배다. 어느새 머리는 희끗희끗, 조카는 자라 어른이 되었고 언니와 형부는 이제 같이 늙어간다. 그러니 더 편안해진다.
기분 좋은 만남이 이어진다. 맛있는 것도 먹고 이야기도 나눈다. 우리 아이를 위해 만난 것을 강조하며 우리 아이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엄마인 나도 덩달아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기쁘다.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불편함이 생기고 만다. 성인이 된 조카가 언니를 대하는 태도, 말투가 조금씩 신경 쓰인다.
입 안에 음식이 있는 채로 말하지 말라, 입 안에 음식이 보인다, 휴지를 왜 이렇게 많이 쓰느냐 등 일상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껄끄럽다.
언니가 불판에 달궈진 그릇을 손으로 잡다 "앗, 뜨거."하는 순간 "엄마, 괜찮아?"라는 반응이 바로 나오는 것보면 분명 엄마를 사랑하고 챙기는 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편함은 무엇인가.
지적질이다. 언니의 잘못된 행동이나 못마땅한 모습에 대해 지적하듯 말하는 말투이다. 언니가 모르는 것에 대해 무시하는 듯한 태도이다. 이러한 것들이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같이 있는 울 아이를 자꾸 쳐다보게 된다. 상황 자체에 대해 민망함이 생기는 건 왜인가. 이 상황에서 우리 아이라면 이러지 않은데. 뭐가 문제일까?
생각해보면 나또한 엄마에게 그런 딸이었다. 못마땅한 모습, 하지 말았으면 하는 모습들이 보일 때마다 못마땅함을 그대로 토해낸다. 듣기 싫은 말에 귀 막고 보기 싫은 모습에 틱틱거린다. 나도 그런 딸이었음을 언니네가 가고 난 후에야 깨닫고 만다.
언젠가 친구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남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면서 이상하게 엄마에게는 그게 안 된다며. 엄마에게는 왜이리 못된 딸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했던 이야기가 지금에야 떠오른다.
내가 그런 딸이었던 것은 잊은 채, 조카의 모습에서 불편함만 느낀다. 우리 아이는 그렇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며 마음을 쓸어내린다.
왜일까.
왜.
왜.
왜 엄마에게는 이토록이나 가시 돋힌 말을 퍼붓게 되는 걸까. 엄마는 그래도 되는 존재라도 되는 걸까. 받아주니깐. 모든 것을 품에 안듯 받아주니깐 엄마에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그리 못된 딸, 그리 못난 딸이었음을 이제와 다시 고백한다.
조카의 모습을 탓할 게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린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받고 있는가. 가족이니깐. 다 받아주고 다 포용해주는 것이 아니냐며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도 상처를 낸다.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만다. 딱지를 뜯어내어 솟구치는 핏방울에 희열을 느끼기라도 하듯 그렇게 상처를 낸다. 결국 그 상처는 나에게 돌아온다는 걸 뻔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늘도 그렇게 상처를 내고야 만다. 핏방울이 맺히도록.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사랑할 수는 없는 건가. 이모의 눈으로 조카를 바라보지 않는다. 나 또한 같은 딸이 되어 엄마를 바라본다. 이제야 뒤늦은 후회로 가슴을 친다. 조카는, '언니의 딸'인 조카는 부디 나처럼 뒤늦은 후회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작은 바람을 가지며, 잘 커준 우리 아이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오필리아처럼~
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