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발 사건

by 필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파란수영장에 가다보니 늘 만나는 분들이 생긴다. 파란수영장은 빨간목욕탕과는 다르게 남자분들도 만난다는 게 재미있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빨간목욕탕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언젠가 빨간목욕탕에서 세신사 언니랑 다른 언니랑 여럿이서 무슨 말을 하는 끝에 세신사 언니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남탕에서 세신하면 인기가 짱일 건데 말이야!"


푸하하하하. 무슨말 끝에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빛바랜 흑백사진마냥 오래된 기억이 된 듯하다. 어딜 가나 19금 이야기가 재미있는 법! 세신사 언니의 말에 한바탕 크게 웃었던 기억이 희미한 기억을 뚫고 큰소리친다. "이렇게 웃었잖아! 이렇게나 신나게 재미있다고 웃었잖아! 그걸 까먹냐?" 라고.


안 까먹었다. 기억한다. 우리 언니들과 행복했던 그때를! 영원히 간직한다. 이젠 '빨간목욕탕' 책으로 태어나 영원히 내 새끼가 된다.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마라. 빨간목욕탕아!


빨간목욕탕 이야기에 잠시 젖어버려 살짝 딴 길로 다녀온다. 이해해주시기를! ^^;;




초급·어린이용 레인 바로 옆은 중급 레인이다. 중급 레인부터가 어른 깊이다. 초급은 어린이용과 함께여서 0.9M. 그러니깐 내가 일어서면 허리도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초급이니, 중급 레인으로 갈 수도 없고.


이 중급 레인이 아침이면 남자 세 분이 거의 독차지를 한다. 한 분은 불편한 몸으로 걷기만 하시는 분, 한 분은 길다란 스티로폼을 몸에 끼운 채 우주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듯 걸으시는 분, 또 한 분은 처음엔 킥판을 끼워서 엉거주춤 걷다가 나중에는 오리발을 끼고 신나게 수영을 하시는 분. 이렇게 세 분이서 중급 레인을 독차지한다.


중급 레인에 오는 다른 사람들을 주먹 세계의 행님들처럼 인상 한 방으로 쫓아내는 걸까? 아니다. 고급, 마스터 레인은 수영 고수들이 진짜 물개가 된 듯 노니는 곳이고 초급은 나처럼 낮은 이곳에서 물장구를 치고 노는 것뿐이다. 남자분들만 있다고 가지 않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정작 남자 세 분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는 생활지침을 잘 지키듯 아무 관심도 없다.


"이거 한 번 끼고 해봐요. 잘 나간다."


레인 끝에서 발차기만으로 숨을 헐떡이며 서 있던 필이 앞에 길다란 오리발이 등장한다. 무슨말인가하고 오리발을 잡고 있는 손을 따라 가니 중급 레인에서 오리발을 끼고 신나게 물놀이하는 어르신이 살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발차기 가르쳐주는 쌤이 아는 삼촌이라고 한 바로 그 분. 날마다 만나며 인사도 하고 한 번씩 이야기도 했으니 제법 친해졌다 할 수 있겠지?


발차기만으로는 앞으로 나가지가 않는다. 만날 제자리에서 발만 차다 결국 물 속으로 꼬로로록! 그걸 보고 계셨던 게다. 아니지. 왜 이렇게 앞으로 안 나가느냐는 나의 투덜거림을 들은 게다. 아오, 쪼까 창피하네! 아무튼 앞으로 잘 나간다는 말에 냉큼 오리발을 받아 신는다.


오예~


진짜다. 앞으로 쭉쭉쭉쭉 나간다. 킥판을 붙잡고 발을 살짝만 까딱거리는데도 앞으로 슈~웅~ 나간다. 너무 신난 나머지 더 빠르게 더 멀리 나가려는 욕심에 발을 휘젓다 그만 물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만다. 이런이런.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발이 필이 발이 아니다. 오리발 녀석이 바닥 타일에 닿으면서 미끄러져 몸이 자꾸 빠진다. 일어서려고 하면 퐁당. 일어서려고 하면 꽈당. 이제야 생각나는 한 마디!


"바닥에 닿으면 미끄러우니깐 조심하고."


아하하하하. 이 말이 이제서야 생각나다니.

물 속에서 오리발을 벗겨내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는 커다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와 사투를 벌이건만, 필이는 오리발을 벗겨내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목숨을 담보로 한 사투. 당연하지 않은가. 접시물에도 코가 빠져 죽을 수가 있다는데 0.9M의 물에 빠져 생사를 달리할 수도 있는 법! 빨리 오리발을 벗겨내든지, 다시 수영을 해서 레인 끝, 안전지대로 가든지 해야 한다.



다시 수영을 할 엄두도 나지 않은 채 꼴깍꼴깍 물을 마셔가며 오리발 벗기기에 한창이다. 삼촌 아저씨 발에 맞는 것이니 치수는 당연히 엄청 큰 것. 그럼에도 물의 압력으로 이놈에 오리발은 벗겨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다. 필이가 요령이 없는 것이다. 물 속이라는 두려움에 허우적 대느라 차분하게 벗겨내지를 못하는 것이다.


겨우겨우 오리발을 벗고 죽음 직전에 살아돌아온다. 너무 기쁜 나머지 하늘을 향해 "나 살아돌아왔어요!" 외치고 싶건만 세상 사람들은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 알고 보면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린 건 단 몇 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짧았는지도 모른다.


"초보자는 이런 거 신으면 안 돼. 두 달 동안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발차기만 하라니깐. 참나. 오리발을 끼고. 참나."


발차기 쌤에게 한 소리 듣는다.


"네. 발차기만 2개월. 열심히 할게요."


"이게 커서 그렇다. 작은 거는 괜찮을 긴데. 내꺼가 크다."


자신의 오리발을 빌려줘서 한 소리 듣는다고 미안하신 걸까? 앞으로 나가지 않는 나를 위해, 선한 마음에서 하신 행동인 걸.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한 잘못이지.


아무튼, 발차기만 2개월. 명심 또 명심하자! 내 발이 아닌 오리발의 힘으로 앞으로 나가려고 한 벌이다.


아하. 고 벌 한 번 되게 아프네. 고것 참!

필이 발이 오리발이 되어 힘차게 앞으로 나갈 때까지 발차기만 2개월. 명심 또 명심!




오필리아처럼~

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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